우리말에게 시를 묻다, 조정

최근 저는 조정 시인이 쓴 <그라시재라, 서남 전라도 서사시>를 편집했습니다. 이 시집에 대한 평가가 너무 엄청납니다. 같은 문인들의 평가만 모으면 이러합니다. “너무 놀랍니다. 백석 시집을 보는 느낌이어요.” (이동순 시인), “말이 어떻게 문장이 되고 시가 되는지 잘 보여주는 교범적 가치가 있다.”(김명기 시인), “여성주의와 문체혁명의 결실을 보는 듯 기쁘다.” (김경윤 시인), “문학사는 물론 국어사에도 아주 귀한 작품집.” (임희구 시인), “보기 드물게 정성이 가득한 시집.” (정양 시인), “첫 줄에 확 무너졌어요.” (전영관 시인), “세포에서 살아나는 것 같은 짠하고 솔찬한 이야기들.” (이종수 시인), “맛있는 음식을 아껴먹듯 작품 한 편씩 음미하고 싶은 책이다.” (박성천 소설가). “시집의 이름을 달고 나온, 시집을 넘어서는 책일지도 모른다. 시의 가능성과 보폭을 무한히 확장하는 책.”(서효인 시인) 등등. 그밖에도 독자들의 놀라운 서평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다음은 <그라시재라>를 쓴 조정 시인과의 인터뷰입니다. 짧게 핵심만 전합니다다^^

코디정: 2007년 첫 시집(이발소 그림처럼, 실천문학사)을 펴낸 후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입니다. 그동안 쓴 시도 수북할 것 같아요?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뭘하고 있나 궁금해하시는 분들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시의 근황을 묻습니다.

조정 | 3년 전에 고양시에서 어느 분이 저를 소개하면서 이분이 옛날에는 유명한 시인이셨대요라고 해서 크게 웃을 뻔 했어요. 옛날이건 오늘날이건 저는 유명해본 적이 없잖아요. 시인이란 직무를 제대로 시작도 못한 것 같은데 과거형이 웬 말입니까. 첫 시집을 내고 15년이 지나는 동안 장편동화를 한 권 출간했을 뿐이지만, 시는 계속 썼어요. 그저 혼자 썼어요. <그라시재라>가 그간 작업의 일환이지요. 수북한 시 중에는 사회적 현안들에 대응해 쓴 시도 있고, <열두 시인>이라는 크리스천 시인들의 동인지에 제출한 시들도 섞여 있는데, 잘 분류해서 늦지 않게 세 번째 시집을 내고 싶습니다.

 

코디정 | 지난 십 년 넘는 세월, 시집을 ‘펴내는’ 노력보다는 권력과 ‘싸우는’ 수호자 같은 역할을 하느라 바쁘셨던 것 같아요. 제가 기억하기로, 동네 대형유치원의 횡포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안전한 동네 만들기 운동과 제주도 강정마을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 있었고요. 그리고 고양시 산황산을 지키는 싸움에서도 8년 동안 산신령 역할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싸움을 관통하는 정신은 ‘환경 윤리와 정의’로 해석되고요. 이런 활동은 필연적인 것이었나요 아니면 우연적인 것인가요?

조정 | 운 나쁘게 그 동네로 이사를 갔다, 운전 중에 길을 잘못 들어 강정마을로 간 바람에 해군기지 문제와 대면했다, 환경단체 의장으로 이름만 올려달라는 말에 얽혀들었다, 그래서 우연이라고 말해왔지만, 실은 필연이겠지요. 그 문제들이 모두 지자체와 대한민국 정부의 저급한 일처리 결과잖아요? 권력과 자본이 결탁한 그 중과부적을 피하면 되는데, 제 판단과 성정이 싸움을 결정한 것이니 필연이라고 생각해요.

 

코디정 | 조정의 문학, 혹은 조정이 생각하는 문학에서는 무엇이 특히 각별한가요?

조정 | 공중이나 풀밭이나 사람들 눈 속에 커다란 실 뭉치가 공처럼 던져져 있고 저는 그 끝을 붙들게 돼요. 그 실을 감는 게 제 시 쓰기인데 원사가 ‘비애’더군요.

 

코디정 | 그렇군요. ‘비애’군요. 그런데 조정의 비애에 동참하기까지는 좀 문턱이 있어요. 뭔가 사전 지식이 필요할 것 같고, 어쩐지 시간을 좀 꺼놓은 다음에 작심하고 읽어야 할 듯합니다. 시인이 독자의 세계에 참여하기보다는 독자가 시인의 정신세계에 참여할 때 생기는 이런 문턱에 대해서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조정 | 첫 시집을 낸 후 이 질문과 비슷한 고민을 오래 했어요. 소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같은 시가 독자에게 무슨 유익, 하다못해 글 읽는 기쁨이나 공감, 확장 같은 걸 제공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좀 휘둘렸습니다. 알아듣게 말하는 것에 대한 부채감이었죠. 물론 알아듣지 못할 말이 펼치는 우주를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 부채감을 어느 정도 해소한 것이 이번 시집 <그라시재라>입니다. <그라시재라>처럼 독자들 속에 포진한 보편적 시심을 적극적으로 공유한 친절한 시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다양한 시들도 있습니다. 그런 시를 누리기 위해서 독자들 역시 ‘문턱 넘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악 듣는 귀나 미술 작품을 보는 눈의 높낮이처럼, 딱딱하지만 잘 말린 오징어를 씹는 맛처럼, 서사가 대거 배제된 압축적 은유를 읽어내는 재미도 누리시길 바랍니다. 콘서트 표를 사는 것처럼, 갤러리에 입장하는 것처럼, 시집도 사시고요.

 

코디정 | 그런데 이번 시는 굉장히 신기하단 말이지요. 시인이 말을 하지 않아요. 좀처럼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데 시인의 정신세계가 느껴진단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시를 기획하게 됐으며, 이런 느낌은 대체 무엇일까요?

조정 | 시인이 꼭 집어 슬프다고 쓰지 않은 시를 읽으며 징하게 슬플 때 사용하는 용어를 국어시간에 배웠지요 애이불비라고.^^ <그라시재라>의 시들이 채록이면서 채록이 아니라는 것을 웬만한 독자들은 다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야기들은 채록에 가까운 수준으로 기억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면서 들어온 모든 전라도 말과 사건의 모티프들을 동원했다는 면에서 채록입니다. 그러나 말로는 못한 발화자들의 깊은 슬픔, 억울함, 말로 들으면 이해가 되는데 그대로 글로 옮기면 호흡이 사라지는 내용을 보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되도록 많은 어휘를 담는 것도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바느질 자국이 나지 않게 픽션을 배분한 것으로 보면 채록이 아닙니다. 물론 그 픽션 역시 제 안에 쌓인 말과 일의 적재함에서 나왔겠지요. 사람들 속에 담긴 문학을 문학 되게 하는 세밀한 작업은 시인이나 작가가 부여받은 기능이고 의무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작가의 의중이 표면상으로는 읽히지 않는데 은연중 느껴질 것 같습니다.

 

코디정 | 김경윤 시인이 <그라시재라>를 평하기를, 고정희 시인이 말했던 “여성주의와 문체혁명”의 결실은 봤다고 하고, 저도 편집자로서 이 시집에 나온 여성들의 목소리야말로 한국 페미니즘 문학의 정수처럼 느껴졌어요. 문체는 제가 지금껏 아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이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정 | 장애인이 있는 곳에 장애인의 편의와 인권을 위한 제도가 작동하는 것처럼 여성이 있는 곳에 당연히 페미니즘이 있어요. 또한 제도적 약자이지만 존재로서 강한 특질을 가진 여성과 고급한 남도 문화와 정서를 이어왔으나 천민의 언어처럼 취급되는 전라도 말은 비슷한 점이 있어요. 제도 교육으로 연마하거나 가면을 들씌우지 않은 날것의 여성성을 다감하고 인내심 깊은 언어로 표현하려고 나름 노력했습니다. 고정희 시인이 강조했던 여성주의와 문체혁명에 적으나마 조응한 게 맞다면 한편 기쁘고 한편 여럽죠.

 

코디정 | 조정 시인이 생각하는 우리말이란 무엇일까요?

조정 | 한반도와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말이겠지요. 시시각각 소멸되는 민족어가 있는 가운데 아직 6000여개의 언어가 세계에서 사용됩니다. 하와이의 경우는 영어와 하와이어가 결합된 크레올어가 공용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우리말도 우리에게 힘을 크게 미치는 강대국 언어와 결합도가 늘 높았습니다. 언어의 영향과 문화의 영향이 비례했던 현상을 볼 때 우리말의 보존이 우리 문화의 지속성을 담보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축소하자면, 전라도 말의 보전이 전라도 문화의 풍부함과 지속성을 담보하는 것처럼요.

 

코디정 | 어째서 서남 방언은 이토록 자유로울까요? 언어에도 중력이 작용한다고 가정해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요), 이 시집의 언어는 무중력의 언어 같아요.

조정 | 질문 자체가 매우 좋은 독후감이군요.^^ 전라도 서남지역의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표준말의 억압에 무릎 꿇지 않는 지점이 많으면 좋겠습니다. 표준말의 금형에 갇히면 들판의 자연스러움과 산의 정상에서 바다로 날아가는 시선의 자유함을 얼마간 잃어요.

 

코디정 | 마지막 질문입니다. 서울 사람인 저는 그 소리를 상상할 수 없어서, 어떤 느낌일까 싶어 전라도 사투리를 잘 쓰는 유튜브 영상을 봤어요. 그런데 제가 이 시집을 읽고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언어 세계와 유튜브 사투리는 너무 격이 달랐거든요. 이 시집은 낭송이 될 수 있을까요?

조정 | 그간 잃어버린 심중의 공명과 너그러움이 기억되고, 사투리 사용에 대한 위축감이 사라질수록 옛 어른들의 말씨와 비슷해지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역과 계층, 성향에 따라 말씨가 달라지긴 하고요. 저급하고 쪼잔한 유튜버형 사투리도 있을 수 있겠네요.^^ 이 시집은 당연히 낭송이 가능하죠.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들이 간을 잘 맞추는 것처럼, 할머니나 어머니의 전라도 말을 들어본 분들이 잘 낭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물에 비친 찔레꽃

- 조 정

    

나는 꽃 중에 찔레꽃이 질로 좋아라 

    우리 친정 앞 또랑 너매 찔레 덤불이 

    오월이먼 꽃이 만발해가꼬 

    거울가튼 물에 흑하니 비친단 말이요 

    으치께 이삔가 물 흔들리깜시 

    빨래허든 손 놓고 앙거서 

    꽃기림자를 한정없이 보고 있었당께라 

    그것으로 작문 써서 소학교 때 상도 받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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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까지 전하는 번역, 신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