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까지 전하는 번역, 신혜연

편집자가 묻고 번역가가 답하다. 두 사람의 책 짓는 이야기 (2022-03-28)

 

코디정: 자녀를 양육하면서 노동하는 게 어떤 일상일까요?

신혜연: 오늘 이만큼 작업을 해야겠다 계획을 세우면 여지없이 무슨 일이 생기는 일상이에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있어요. 갑자기 열이 나거나 배가 아프기도 하고, 수시로 다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저는 학원으로 병원으로 태워 갔다 태워 오기 바쁘기도 하고요. 특히 코로나 때문에 등교가 불규칙해졌잖아요? 계속 옆에서 엄마가 상대를 해줘야 할 때가 많아요. 그래도 ‘행복한 정신 사나움’이라고 생각합니다.

 

코디정: 그런 정신 사나움에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앞에 붙이시는 것을 보면 낙관적인 성정이신 것 같아요. 시간을 정해놓고 번역작업을 하기는 어려운 환경이겠어요.

신혜연: 네. 번역하는 시간을 따로 정해두진 않아요. 정해둘 수도 없고요. 육아와 살림을 병행하다 보니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이 아니면 온전히 혼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요. 아이 학원 셔틀 때문에 운전하는 시간도 많고요. 그래서 앉을 수 있고, 노트북을 펼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기면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카페 테이블이면 매우 감사하고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는 운전석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몰입에 시간이 좀 걸리는 편이라서 자투리 시간을 다 작업에 활용하지는 못해요. 그럴 땐 거의 책을 읽는 편이에요.

 

코디정: 대체로 그럴 땐 사람들은 멍때리거나 휴대폰 해요. 하기사 수많은 직업 중에서 번역가를 선택했을 정도면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주로 어떤 책이 마음에 남아있나요?

신혜연: 어릴 때부터 책을 읽고 있을 땐 누가 불러도 모르는 아이였어요. 조금 크고 나서는 용돈을 받을 때마다 동네 서점에 출근 도장을 찍었고, 대학에 가서는 대학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다 읽어버리겠다는 터무니없는 꿈을 꾸기도 했죠. 집과 학교가 멀어 지하철을 오래 타야 했는데, 그때 책을 정말 많이 읽었어요. 가방에 항상 책이 있었죠. 그 시절 읽은 책 중에는 <데미안>, <유리알 유희>, <지하 생활자의 수기>, <혼불>이 기억나고, 이후에는 <눈먼 자들의 도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죽음의 수용소에서>, <로드> 등의 책을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주로 감옥을 좋아하네요.(웃음)

 

코디정: 요즘은 어떤 책을 읽고 계시나요? 관심사는요?

신혜연: 관심사는 그때그때 달라요. 한 작가에 꽂히면 그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기도 하고, 어떤 주제에 꽂히면 또 그 주제를 파고들기도 하고, 중간중간 재미있어 보이는 책들을 읽기도 하고요. 그러다 또 한동안 안 보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책을 보기도 하고, 자유롭게 읽습니다. 요즘은 철학과 인문 분야에서 눈에 들어오는 책들을 보는 중이에요. 스토아철학을 번역하다 보니 그 주변으로 관심이 번지고, 철학사를 개략적으로라도 훑어보고 싶어져서요. 물론 읽기는 열심히 읽는데 그릇이 작아 남는 건 별로 없습니다(ㅎㅎㅎ). 최근에 읽은 책은 <나를 잃어버려도 괜찮아>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도덕경>이에요.

 

코디정: 우리가 아는 노자의 그 <도덕경>요? 한때 <도덕경>의 영어 번역본을 다시 한글로 재번역하는 작업을 생각해 본 적이 있어요. 여러 번 언어를 건넜을 때 의미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살펴보는 예술행위로서요. 근데 <도덕경>은 멋지기는 한데…, 골동품 같은 문장이 좀 불만이에요.

신혜연: 네. 그 <도덕경>이에요. 골동품이라니;;; 하지만 이 책은 그렇지는 않아요. 완전히 현대적인 언어예요. 역자분과 인연이 닿아 읽게 되었는데 제가 번역한 <엥케이리디온>과 표현만 다를 뿐이지 거의 같은 말을 하고 있어서 놀랐어요.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교차점을 만날 때 책을 읽는 재미와 보람을 느껴요.

 

코디정: <엥케이리디온>에 대해서는 있다가 다시 얘기를 나누기로 하고요. 번역가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해 봐요. 고상한 질문은 아닙니다만, 인터뷰 독자들의 영원한 관심사니까요. 어때요, 번역가로서 경제적 수입은 만족할 만한가요?

신혜연: (웃음) 경제적 수입이라는 측면에서 만족스러워할 번역가가 과연 있을까요? 텍스트의 종류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들이는 공을 생각하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편이라고들 하지요. 경제적인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번역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의 가치로 따질 수 없는 보상과 보람이 있거든요. 공부해서 좋고, 그 공부의 결과가 책으로 나오니 남에게도 좋고, 그런데 돈까지 받잖아요. 그런 면에서는 ‘참 좋은 직업. 하지만 부자 되기는 힘든 직업’. 제가 보기에는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번역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꾸준히 많은 걸 보면 이 직업이 정말 매력적이긴 한가 봐요. 냉정하게 말하면, 주 수입원을 책임져 주는 사람(배우자에게 정말 고마울 따름입니다)이 있을 때, 부 수입원으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좋아한다는 조건 하에서요. 그리고 많이 드물긴 하지만 이소노미아 같은 출판사를 만난다는 조건 하에서요.

 

코디정: 이소노미아의 편집자로서 마지막 말씀은 듣기 좋네요. 번역요금에 관해서는 제가 번역가도 아님에도 혼자 고민을 많이 한 적이 있어요. 서비스 직종은 물가상승분이 좀처럼 반영되지 않기 때문에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동의 대가(번역료)에는 그다지 변화가 없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물가상승분이 조금 더 반영된 요금으로 번역을 의뢰하는 것이 ‘윤리적 행위’라는 결론을 당시에 내렸거든요. 그런데 번역가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다들 ‘생산성’으로 문제를 극복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정해진 시간에 더 많은 분량을 번역하는 거요. 말하자면 생산성 그래프가 물가상승 그래프보다 더 높아지도록 하는 것인데, 어떤가요, 선생님이 생각하는 자신의 생산성 그래프는?

신혜연: 그런 식으로 생각하자면 제 생산성은 마이너스입니다. 시간당 얼마를 번역해야 얼마를 벌고…, 그런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아요. 사실 이 부분은 뭐라고 얘기하기가 어렵네요. 누군가에게는 민감한 얘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저의 경우에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번역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가수는 노래하고 배우는 연기하고 연주자는 악기를 연주하듯이, 번역가인 저는 번역을 해요. 그분들이 시간당 수입을 계산하면서 하지 않는 것처럼 저도 그렇습니다. 참고자료가 필요하면 아낌없이 비용을 지불하고, 단어 하나 가지고 씨름하느라 하루가 흘러가도 개의치 않아요. 매번 시간과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면 번역이 정말 힘들게 느껴질 것 같아요. 경제적인 부분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또는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 번역가를 생각하고 있다면 솔직히 말리고 싶어요. 하려고만 든다면 플러스 그래프를 그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번역 자체를 즐기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물론 번역을 즐겁게 하면서 생산성도 높은 실력자분들도 계실 겁니다. 경험이 쌓이고 실력도 쌓이면 제 생산성 그래프도 언젠가는 가파른 우상향을 그리지 않을까요?

 

코디정: 그럼요! 그런데 번역은 언제부터 시작하셨나요?

신혜연: 20대 중반부터 비즈니스 번역을 3~4년 정도 했어요. 주로 한국어로 된 문서를 영어로 번역하는 일이었는데, 영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비해 보수도 괜찮았고 너무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보니 공부가 더 하고 싶어졌고 책을 좋아하다 보니 출판번역에도 관심이 생겼지요. 흔히들 그렇듯 아르바이트처럼 시작했다가 푹 빠져버린 경우에요. ‘주간번역가’라는 카페를 통해 스터디 모임을 하던 중에 <바른번역>이 생겼고 아카데미에 등록하는 동시에 대학원에도 진학해 출판번역 준비를 차근차근 해 나갔습니다. 주간번역가라는 카페가 지금처럼 크지 않았던 시절의 얘기예요. 카페지기님이 이끌어주시는 가운데 지망생들이 모여 소소하게 스터디를 진행했더랬죠. 그 카페지기님에게 정말 많은 도움과 영향을 받았어요. 바른번역과의 인연도 그분 덕분에 맺어진 셈이지요. 아카데미를 수료하면서 데뷔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출판번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코디정: 신 선생님과 저희가 인연을 맺게 된 것도 <바른번역> 덕분이었어요. <바른번역>에 번역을 의뢰하면, 여러 번역가께서 마치 역경매하듯이 의뢰에 참여하고, 출판사가 그중 한 명의 번역가를 선정해서 계약이 성사되는 그런 시스템이었어요. 지금도 그렇고요. 어때요? 번역가에게 <바른번역>은요?

신혜연: 다른 번역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 시스템이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출판사는 마음에 드는 번역가를 찾을 수 있고, 번역가는 자신이 원하는 책에 도전해 볼 수 있고, 책 입장에서는 자신을 잘 번역해 줄 번역가를 만날 확률이 높아지죠. 번역에 들어가기에 앞서 서로 바라는 부분이 기본적으로 맞춰지니까 진행 과정에서 마찰이 생길 가능성도 적고요. 경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오로지 책과 번역만을 놓고 보기 때문에, 그리고 검증된 출판사의 의뢰가 주로 올라오기 때문에 실력 있는 초보 번역가에게는 안전한 데뷔 창구가 될 수 있어요. 다른 번역가들과 실전에서 실력을 겨룰 귀한 기회이기도 하고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무엇보다 책 입장에서 좋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모든 번역가는 아니어도 최소한 샘플 참여한 번역가 중에서는 가장 적합한 번역가를 만나게 되니까요.

 

코디정: 그런 샘플번역에 참여한 번역가 중에서 한 명의 번역가를 고르는 작업이 처음에는 몹시 낯설었어요. 합리적인 시스템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선택되지 않은 번역가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헛고생시킨 미안함이랄까요? 아무튼 에이전시 회사가 행정적인 면을 처리해 주니 번역가에게도 출판사에게도 이로운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바른번역에 대해 좀 더 소상히 말씀해 주세요.

신혜연: 바른번역은, ‘번역가들이 모여서 이런 단체를 만들어보면 어떨까?’했던 단계부터 알고 있어서 사실 제 애정이 조금 남다를 수 있어요. 출판 번역 지망생일 때 스터디를 이끌어 주셨던 분께서 지금의 대표님과 고민 끝에 번역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만드셨죠. 지금은 번역아카데미와 에이전시 비중이 크지만, 당시에는 번역가 단체였어요. 정기적으로 번역가들의 모임이 있었고 같이 머리를 맞대고 시스템을 수정 보완해 나갔었죠. 그리고 ‘바른번역 아카데미(현 글밥 아카데미)’가 개설되었고요. 1기에 저를 포함해 두 사람이 데뷔 기회를 얻었고, 그렇게 계속 번역가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개인적인 사정으로 한참 떠나있다시피 해서 중간의 사정은 잘 모르지만, 규모가 커지면서 어쩔 수 없이 에이전시의 역할이 커지게 되었을 거라고 짐작해요. 하지만 여전히 번역가의 권익 보호가 최우선시되고 있다고 느낍니다. 번역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최적화되어 있어요. 계약과 번역 일정 조율, 번역료와 관련된 모든 껄끄러운 소통을 대신해 주고 최소한의 수수료를 받습니다. 그나마도 함께 작업한 권수가 늘어날수록 줄어들고요. 저는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코디정: 바른번역에 소속된 번역가는 바른번역을 통해서만 번역의뢰를 받고 작업하는 거지요? 불편한 점은 없나요?

신혜연: 제가 알기로는 아니에요. 따로 의뢰를 받아도 됩니다. 다만 작업 일정은 공유해야 하고요. 저도 그렇게 작업한 책이 있어요. 마땅한 역자를 찾기 힘들다고 개인적으로 의뢰가 들어와서 작업을 진행했었죠. 일정을 공유하는 건, 바른번역에서는 동시에 여러 권 작업하는 걸 지양해요. 번역의 질과 일정에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합리적인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원칙이 있어야 출판사 입장에서도 바른 번역 소속 번역가를 믿고 의뢰할 수 있겠지요. 출판사와는 언제든 연락처를 공유하고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신뢰가 쌓이면 샘플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작업을 진행하는 경우도 많고요. 지금 이소노미아와 제가 그렇듯이요. 다만 타 에이전시와 동시에 중복 활동은 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른번역과 거래하는 출판사와 개인적으로 거래해서도 안 되고요. 이건 바른번역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라고 생각해요. 바른번역에 소속되어 일하는 가장 큰 장점은 행정적인 면에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정적 에너지 소모가 거의 없어요. 이 점은 출판사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서로 존중하면서 역할에 충실하면 되는 구조입니다. 제가 무슨 바른번역 홍보대사 같네요(ㅎㅎㅎ).

 

코디정: 이제 선생님의 번역세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 번역한 책은 무엇이었나요?

신혜연: 처음에 번역한 책은 황금가지에서 나온 <황금살인자>라는 소설이에요. <황금살인자>는 로베르트 반 훌릭이라는 네덜란드 작가가 중국의 판관 디 런지에를 주인공으로 해서 쓴 4권의 시리즈 중 한 권이에요. 이희재 선생님의 번역을 그때 처음 접했죠.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을 번역하셨는데, 읽으면서 정말 감탄했어요. 덕분에 큰 공부가 되었고, 아카데미를 수료하면서 처음으로 의뢰받은 책이라 기쁘게 작업했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이라 재미도 있었고요. 얼마 전 그 책을 기억하는 독자를 만나 무척 반가웠어요.

 

코디정: 최근 역서는요?

신혜연: 가장 최근에 나온 역서는 스토아 철학의 정수를 담은 <엥케이리디온>입니다. 이 책은 개인적으로 제게 큰 위로와 힘이 된 책이에요. 번역가로 데뷔한 이후로 결혼과 함께 길고 험난한 임신과 출산, 육아, 간병으로 인해 번역을 거의 못 했습니다. 아예 손을 놓고 있으면 정말 복귀를 못 할 것 같아서 간간이 작업을 하긴 했지만, 바닥난 에너지를 긁어모아야 했고 한 권 끝내고 나면 녹다운이 되어버리기 일쑤였죠. 앉아있기도 힘들 정도로 기진맥진해지곤 했어요. 그러니 한 권 작업하면 한동안 쉬는 패턴의 반복, 그렇게 힘들게 번역한 책들이 몇 권 있어요. 이소노미아의 <최면술사><웃음>도 그중에 있고요. 희한하게 책만 맡으면 무슨 일이 생겼어요. 조금 유난스러운 마감 징크스가 있죠. 그래서 책마다 크고 작은 사연이 얽혀있어요. 나는 번역을 하면 안 되는 사람인가보다 그런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몸을 추슬러 조심스럽게 다시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소노미아와도 다시 연이 닿았습니다. <엥케이리디온>이 그렇게 나오게 되었어요. 옮기는 내내 내가 지나온 과정이 그 안에 그대로 담겨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번역하는 과정에서 큰 위로와 힘을 얻었죠. 그 위로와 힘이 독자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코디정:  다양한 출판사와 협업하시잖아요? 출판사의 스타일은 어떤가요? 낯뜨거운 질문입니다만, 다른 출판사와 비교해서 이소노미아는 어떤가요?

신혜연: 출판사마다 (담당 편집자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바른 번역의 시스템을 통해 소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크게 다르진 않아요. 따로 연락을 주시는 경우도 많지 않고요. 그런 면에서 이소노미아는 좀 다릅니다. 사용하시는 언어도 다르고, 소통하시는 스타일도 다르고요. 바른번역의 담당 팀장님께서도 ‘굉장히 친절한 출판사’라고 따로 언급 하실 정도로 사람과 일을 대하시는 태도에 남다른 점이 있어요. 많은 출판사를 겪어본 건 아니지만, 이소노미아에게 받은 특별한 느낌을 얘기하자면, 책을 돈으로 보는 곳이 아니다, 좋은 책을 만든다는, 만들 거라는 자부심과 열정, 역자에 대한 ‘극’존중, 모든 것에 정성과 배려가 스며 있죠. 그런 점이 역자의 번역에도 분명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코디정: 진짜 낯뜨거운 답변을 받았습니다.(ㅋㅋㅋ) 근데 저희가 좀 인간적으로 따뜻하기는 하지만, 문장에 관해서는 아주 잔인할 정도로 개입할 때가 많아요. 그래서 좀 죄송스러운 기분이 들지만, 독자를 생각한다면 그런 잔인함이 편집자 역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문장 안으로 들어가게 돼요. 다른 출판사에서도 편집자가 번역가의 문장에 개입하나요? 편집자가 개입했을 때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나요?

신혜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입은 늘 있습니다. 소제목 정도에 그치기도 하고, 단어나 문장에 이르기도 하지요. 아시다시피 번역이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하는 고독한 작업이기도 한 만큼, 우리말로 잘 안 풀려서 고심했던 부분이 편집자의 손을 거쳐 매끄럽고 명료하게 바뀌면 천군만마를 얻은 느낌이 들기도 해요. 편집자는 역자에게 유일한 동료이기도 하거든요. 가장 먼저 원고를 읽어주고 역자가 미처 보지 못한 부분을 살펴주는 소중한 존재죠. 책의 완성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는 사람이니만큼, 저는 편집자의 개입을 반기는 편입니다. 그만큼 책의 완성도가 높아진다고 보기 때문이에요. 출간 전 역자 교정이 반드시 이루어지고 역자의 의견이 존중되는 한 개입은 얼마든지 환영입니다. 하지만 개입할 일이 없는 원고를 만들어내는 게 제 최종목표랍니다.

 

코디정: ‘개입할 일이 없는 원고’라니, 편집자로서도 완전 좋지요! 그런데 출발언어(영어)와 도착언어(한국어) 사이에서 어떤 원칙으로 번역하는 게 좋을까요? 훌륭한 번역이란 무엇일까요?

신혜연: 어려운 질문을 주셨네요. 이상적인 것은 등가번역이죠. 그게 참 어렵고 어찌 보면 불가능하다는 데서 계속 이 질문이 나오는 걸 테고요. 번역하려는 텍스트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먼저 봐야겠지요.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인 텍스트면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느낌이 전달되어야 하는 텍스트면 그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중점을 둬야 할 것입니다. 그림이 그려져야 하면 도착언어로도 그림이 그려져야 하고, 향기를 전달해야 하면 도착언어로 읽었을 때도 그 향기가 전해져야죠. 그게 바로 훌륭한 번역이라고 생각해요.

 

코디정: 그렇게 표현하니 번역이 매우 황홀하고 숭고해지는 기분이 들어요.

신혜연: 물론 참 힘든 일입니다. 하지만 ‘모든 번역의 목적은 출발언어를 모르는 독자들이 원문의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라는 원칙을 최상위에 놓고 보면 직역이니 의역이니 하는 방법론적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번역이지요. 그림, 음악, 일상에서 주고받는 모든 언어가요. 각자 어떤 필터를 통해 내놓았느냐의 차이일 뿐이고, 번역가는 그걸 서로 다른 두 언어로 하는 것뿐입니다.

 

코디정: 그런 원칙이 일관되게 반영된 성과를 100점이라고 가정할 때, 지금 하시는 성과에 점수를 주신다면?

신혜연: 후하게 주면 80점, 솔직히는 75점 정도로 생각합니다. 너무 후한가요?

 

코디정: 많이 짜네요. 제가 채점한다면 무조건 10점을 더해야겠어요.

신혜연: 아직은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목표는 90점입니다. 나머지 10점은 독자분들의 몫이고요.

 

코디정: 우리가 세 권의 책을 번역했잖아요? 2019년에 발행된 마크 트웨인의 <최면술사>, 2021년 앙리 베르그송의 <웃음>, 그리고 최근(2022년 3월)에 발행된 에픽테토스의 <엥케이리디온>. 앞으로도 저희랑 수십 권 책을 내셔야지요? 마크 트웨인의 자서전에 수록된 텍스트와 단편소설을 엮은 <최면술사>의 번역본을 편집하면서 놀랬어요. 마크 트웨인 특유의 유머와 해학을 어쩜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말로 번역했을까요? 이 책을 작업하실 때의 얘기 좀 해주세요.

신혜연: 제 번역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소노미아와 수십 권이라니, 생각만 해도 행복하네요. 번역이 그렇게 느껴졌다면 전적으로 원문 덕분일 거예요. 마크 트웨인에 대해서는 허클베리핀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소노미아에서 엄선하신 산문과 소설들을 읽어보니 정말 이분이 왜 그렇게 유명한 작가인지를 알겠더라고요. 내내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죠. 너무 재미있었고 줄거리가 기가 막혔어요. 소설로만 접했다면 절대 알지 못했을 이야기도 있었죠. 아마 그런 느낌이 번역에 그대로 묻어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출간된 책에는 빠졌지만 <셀러스 대령의 가정 초대회>에도 저는 애정이 많아요. 사실 기억에 많이 남는 작품이에요. 언제 소개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코디정: 그게 어떤 이유로 <최면술사>에서 빠졌는데 언젠가 소개할 기회가 생기리라 생각해요.

신혜연: <최면술사>를 다시 번역한다면 조금 더 다듬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아이도 어렸고 시어머님이 암투병 중이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번역에 할애할 시간이 많이 부족했어요. 거의 잠을 못 잤죠. 그런데 마감을 얼마 앞두고 어머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되셨어요. 도저히 마감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어렵게 연락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냥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고 경황이 없었지요. 그때, 몸과 마음을 잘 추스르고 천천히 원고를 보내달라는, 따뜻한 답변을 받았어요. 놀라고 지쳐있던 마음에 큰 위안이 되었지요. 그리고 나중에 무사히 원고를 보내드릴 수 있었고요. 지금도 정말 감사해요.

 

코디정: <웃음>은 많이 어려우셨죠?

신혜연: 어려웠죠. 책도, 당시 제 상황도. 책에 들어간 번역가의 말 말고 개인 공간에 올린 B급 역자 후기에 썼듯이, 개인적으로 힘든 시기였거든요. 잠을 이룰 수 없는 새벽마다 <웃음>을 펼쳐놓고 힘겹게 한 줄 한 줄 번역해 나갔습니다. 쉬운 텍스트였더라면 오히려 그 시기를 넘기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어요. <웃음>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온전히 번역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게 억지로라도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웃음>에는 몰리에르의 희극이 대거 등장하는데, 일일이 작품들을 찾아 해당 텍스트의 맥락을 파악하는 작업이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번역을 정말 제대로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서 문장을 고치고 또 고치기를 반복했지요. 읽고도 무슨 뜻인지 몰라서 다시 읽는 일이 없도록, 원문의 텍스트가 그리고 있는 그림이 독자의 머릿속에 바로 그려지도록 끊임없이 확인했던 것 같아요. 늦었지만 무사히 출간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하도 출간 소식이 없어서 전 제가 번역을 망쳐놓은 탓이라고 자책했었어요. 그런데 깜짝 선물처럼 생각지도 않은 시기에 출간 소식을 전해주셨죠. 당시 팔이 부러져서 입원실에서 수술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번역에 대한 헌사까지 넣어주셔서 하나도 안 아프고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답니다. 여러 가지로 잊지 못할 책이에요.

 

코디정: 일단 편집자가 번역가의 1번 독자잖아요? 저는 <웃음> 번역 덕분에 희극에 대한 제 인식의 지평을 넓혔어요. 아주 고마운 마음이에요. <웃음>은 번역에서 출간까지 시간이 많이 지체됐지만 <엥케이리디온>은 번역에서 출간까지 전속력으로 이루어졌어요. 2월에 완역해서 3월에 출간됐으니까요. 사실 번역 자체에 대해서는 편집할 게 없었어요. 이 번역의 성과를 어떻게 빛낼 것인가만 고민하게 되니까 아주 즐겁게 작업했던 것 같아요. <엥케이리디온>에 대해서도 한 말씀 해주세요. 텍스트와 번역작업에 관해서요.

신혜연: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책, 오랫동안 읽힐 책을 번역하고 싶다는 제 말에 이소노미아에서 선물처럼 의뢰해주신 책이 <엥케이리디온>이었어요. 분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가볍게 생각했다가, 자료 조사하면서 완전히 얼어붙었죠. 쟁쟁한 역서들이 즐비한 거예요. 게다가 원문은 헬라어였고요. 중역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번역이 그렇잖아요. 역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번역될 수 있거든요. 헬라어를 모르니 영어를 거쳐 다시 한국어로 옮길 때 어떤 번역어를 택해야 할지 너무 고민이 되는 거예요. 기존 역서들도 저본이 다른 만큼 다르게 해석된 부분들이 있었고요. 원문에서 정확히 어떤 뜻이었는지 궁금해 미치는 줄 알았죠. 그때 도움을 받은 책이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저술하신 김재홍 선생님의 연구자료들이었어요. 아주 꼼꼼하게 헬라어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분석해 놓으신 덕분에 밝은 길잡이로 삼을 수 있었지요. 해석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 영문 번역본도 가능한 여러 개를 비교 분석해가면서 돌다리 두드리듯 번역을 했습니다. 경어체를 택한 것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되는 부분이 있어요.

 

코디정: 네. 그런 고민을 말씀해 주셨지요. 저도 항상 고민이에요. 구어, 경어체 번역에 관해서요. 하지만 저는 글과 말이 서로 가까에 있었으면 해요. 오늘날 우리말은 글과 말 사이 간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서기 1세기의 대철학자인 에픽테토스가 지금 시대 서울에서 강의를 한다면 틀림없이 경어체를 썼을 겁니다.(웃음) 미래에 어떤 작가 혹은 어떤 장르의 책을 번역하고 싶다, 라는 게 있다면요?

신혜연: 저는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이건 꼭 내가 번역하고 싶다 그런 욕심보다는, 누군가 번역을 벌써 했었어야 함에도 아직 안 되어 있는 책, 중요하고 번역이 필요한 책인데 다른 번역가들이 꺼리는 책, 이런 걸 자꾸 하고 싶어요.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 많고 너도나도 하겠다는 책은 걱정이 안 돼요. 누군가 잘하겠지요. 그런데 애타게 번역을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있을 거잖아요. 누군가는 해야 하는데 아직 번역가를 만나지 못한 책들, 누군가는 다시 번역해야 하는 책들, 그런 책들에 마음이 가요. 그런 책을 찾아내서 번역해 주고 싶어요. 이런 책을 하나 만나서 인세로 계약을 하고 아름답게 번역을 마친 후 그 책이 베스트 & 스테디셀러가 되면 참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가끔 재미로 해봅니다(ㅎㅎㅎ), 책을 보는 눈부터 일단 키워야겠지요. 번역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런가 봐요, 기회가 되면 나중에 다시 물어봐 주세요.

 

코디정: 기억해 두겠습니다. ‘기억’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여쭤 봐요. 번역가로서 앞으로 어떤 번역가로 기억되고 싶다, 라는 게 있다면?

신혜연: 믿을 수 있는 번역가요. 믿고 ‘맡길’ 수 있고 믿고 ‘읽을’ 수 있는 번역가로 기억된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코디정: 이제 인터뷰를 슬슬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간단한 질문. 코로나 슈퍼항체를 보유한 신인류가 많아졌습니다. 예전처럼 사람들이 자유롭게 국경을 건너며 여행할 수 있게 돼서 어딘가로 여행을 갈 수 있게 된다면, 어디로 한 번 가보시겠어요?

신혜연: 예전에 혼자 여행하면서 꼭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오겠다고 다짐했던 프라하가 가장 먼저 떠올라요. ‘프라하의 봄’에 맞춰 남편, 아들과 스메타나를 들으러 가고 싶어요. 오로라도 직접 보고 싶고, 대자연의 신비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을 많이 가보고 싶습니다. 하늘에서 봐도 좋고 땅에서 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러고 나면 책들을 보러 가야죠. 세계 곳곳의 책방과 도서관을 돌아다니다가 보물 같은 책을 운명처럼 딱 만나는 거예요. 생각만 해도 두근거리네요.

  

맺음말. 시대와 언어를 넘나드는 번역을 생각할 적마다 나는 항상 참으로 고난스러운 노동이라고 생각했다. 번역가 신혜연 선생과의 인터뷰를 통해 어쩐지 무겁다는 느낌을 받는다. 정성이라는 것은 얼마나 큰 무게인가.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며, 누군가에게는 필연적이다. 가수와 배우와 연주가와 번역가가 함께 춤을 추는 듯한 답변, 그림과 향기가 전해지는 번역에 대한 얘기, 사실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이 번역이라는 말씀이 특히 내 마음에 흔적을 남긴다. 오랫동안 기억되는 인터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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