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디정, 국무총리를 만나다


인터뷰이 | 정세균 전 국무총리 


코디정: 하루 일과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든지 뭔가 특별히 하시는 일이 있나요? 


정세균: 글쎄요. 특별한 것 없는데요. 정치인이란 게 좀 피곤한 직업이에요. 집에 귀가하면 주로 조용히 쉬는 편이에요. 예전에 노무현 대통령이 이렇게 말했어요. 밤에 잠을 자기 전에 누워서 내일 일을 생각하고 어떻게 말을 할지 궁리하면서 잠을 잔다고요. 그래서 저도 따라해 보려고 했어요. 잠자기 전에 내일 있을 ‘좋은 발언’을 떠올려 봤는데, 그때마다 금세 잠들고 말더군요. 나는 주로 잠으로 체력 보충을 해서 그러는지 몰라도 그냥 금세 잠들어요.


코디정: 국무총리는 수많은 일을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본래 주어지는 공무도 많겠지만 지난 1년 동안 코로나19 방역사령관까지 맡아야 했으니, 체력적으로 정말 괜찮을까 걱정이 듭니다. 피곤하지 않으세요?


정세균: 원래 내가 체력이 강해요. 많이 걸어서 얻은 체력일 거예요. 좌우간 소년 시절부터 많이 걸었지요. 조그마한 몸으로 매일 왕복 16km를 걸어서 학교를 다녔으니까… 총리가 되기 전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인왕산에 자주 오르곤 했지요. 사람들 만나면 인사하고요. 지금도 여유가 생기면 이른 아침 총리공관에서 삼청공원 계곡까지 산책하고 옵니다. 피곤하면 잠을 자고요. 체력은 타고난 것 같아요. 


코디정: 주위 사람들이 말하더라고요. 총리님은 화전민 출신으로 가난하게 자랐으며 검정고시로 중학교 과정을 이수했을 정도로 사는 게 힘겨웠다고요. (그런데 막상 총리님 얼굴에는 그런 고난의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정세균: 내가 좀 고생은 했어도 아주 어둡게 자라지는 않았어요. 공부도 잘했고, 주위에서 예뻐해 주기도 했고, 그래서 밝게 자란 편이에요. 밤마다 별이 쏟아지고 은하수가 흐르는 깊은 산골에서 자랐지요. 버스정류장에서 8km는 걸어 들어가야 마을이 나옵니다. 지금도 옛날 마을 풍경 생각은 좀 하지요.


코디정: 정치를 오랫동안 하시면서 구설수가 거의 없는데요? 운이 좋은 건가요? 아니면 뭔가 비결이나 원칙이라도 있나요?


정세균: 뭐, 운이 좋다고 봐야지요. 1996년도 초선 의원 시절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당시 국회 재경위원회에서 국정감사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모 대학선배가 내게 전화를 해서는 만나자는 거예요. 한보그룹의 임원인 선배였습니다. “이게 틀림없이 무언가의 청탁이 있는가 보다.”고 생각했지요. 그래도 그땐 누굴 가려 만날 때도 아니어서 일단 만나기로 했습니다. 팔래스 호텔이었어요. 만나서 한보그룹에 얽힌 자기들 사정을 설명하길래 그 설명을 들었지요. “잘 들었습니다.” 하고 나오려는데 종합선물세트 박스를 주는 겁니다. 보통은 아이들 과자가 들어 있지요. 내가 과자를 받을 나이가 아니잖아요? 그래서 사양했지요. 극구 사양을 했는데도 계속 강권하길래, “만약 내가 이걸 받으면 무엇이든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강요하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말하면서 뿌리치고 나왔던 적이 있어요. 


코디정: 그 상자 안에 진짜 과자가 들어있었을 수도?


정세균: 물론 그 박스 안에 정말로 과자가 들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지레짐작만 했을 뿐이니까 거기에 무슨 금품이 들어있다는 확증은 없잖아요? 그래서 그런 얘기를 누구한테도 하지 않았지요. 그후 한보사태가 터지고 한보그룹 국회청문회가 열렸어요. 증인으로 참석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한테 누구에게 로비를 했느냐고 의원들이 물었지요. 그때 정태수 회장이 이렇게 말했어요. 많은 사람한테 로비를 했고 불법정치자금도 줬다고 하면서도 누구한테 줬는지 밝힐 수는 없지만, 우리가 제공한 자금을 거부한 사람은 한 명 있었다고요. “새정치민주연합의 정세균입니다.”라고요. 당시 언론에서 인터뷰하자는 제안이 많이 들어왔었지요. 다 거절했어요. 내가 무슨 도덕적으로 우월해서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저 당연한 일을 기사화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사회가 몹시 혼란스러웠고 주위 정치인들도 힘들어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여럿이 함께 정당정치를 하는데 이런 걸로 자랑하고 다니는 게 좋은 모습 같지는 않더군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아주 간담이 서늘하긴 해요. 상자를 받았으면 그건 ‘종합선물세트’가 아니라 ‘종합독약세트’가 됐을 겁니다. 큰 망신을 당했겠지요. 정치도 오래 못했을 겁니다. 그때 그런 일이 있고 나서는 검은 돈이 아예 접근을 안 합니다. 정치인으로는 굉장한 행운이지요.


코디정: 2004년도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구설수는 어떤 문제였나요?


정세균: 당시 재충전을 하면서 의정활동을 해야 국회의원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어요. 박사과정을 이수해 달라는 요청도 있었고요. 그래서 경희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게 됐는데, 그때 정말 죽을 둥 살 둥 공부했습니다. 국회의원이라고 해서 시험이 면제된다거나 숙제를 제출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하지 않았으니까요. 의정활동을 하면서도 시험도 보고 숙제도 하고 그래야만 했지요. 그런데 나중에 논문으로 시비가 생겼어요. 다른 논문에 있던 문장을 인용하면서 그걸 참고문헌으로 표시까지 했는데, 그게 나중에 개정된 논문 규정에 맞지 않게 인용했다는 거예요. 


코디정: 그런 시비가 벌어졌을 때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정세균: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표절이라고 비난하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저는 수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정치인의 논문이 학자의 논문과 같지 않잖습니까? 학자는 학문을 일생의 업으로 삼지만 정치인은 정치를 업으로 삼지 학문을 업으로 삼지는 않으니까, 당연히 정치인의 논문이 학자의 논문보다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요. 이처럼 수준이 떨어진다면 그 일을 굳이 정치인이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후배 정치인들에게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지 말라고 조언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공부는 하되 논문을 쓰지 마라, 박사과정을 수료해서 공부했으면 됐지 학문을 할 것도 아니면서 무슨 논문이냐, 논문 수준이 떨어지거나 아니면 표절시비에 걸리거나 둘 중 하나가 될 터이니,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고 공부는 즐기되, 학위논문을 쓰지 않는 게 지혜로운 일이 아니겠느냐, 하는 정도의 조언입니다. 명예박사만으로도 훌륭한 것이지요.


코디정: 6선 국회의원으로 오랫동안 입법활동을 하셨는데 특히 기억나는 법률은 무엇입니까?


정세균: 우리나라 복지제도의 시작을 알린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생각납니다.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법이지요. 1999년의 일인데요. 당시 국민의 정부 출범 초기였어요. IMF 위기상황을 극복하느라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국민들 모두가 힘을 모았지요. 이제는 꽤 시간이 흘러서 사람들이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국가적으로 가장 힘든 그 시절에 대한민국 복지가 시작되었습니다.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만들어졌지요. 대한민국 복지의 효시입니다. 그때 한나라당이 처음에는 매우 반대했어요. 당시 여당 박상천 원내총무가 그런 한나라당을 설득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법은 우리가 보수건 진보건 이런 거 가리지 않고 굶어 죽는 사람은 구제해야 될 거 아니냐, 그리고 너희들이 이걸 반대해도 결국은 통과가 될 텐데, 그러면 나중에 반대했다는 오명만 뒤집어쓰니까 차라리 같이 하자는 논리였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복지 얘기를 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십상이었어요. 아니면 우리가 복지를 논할 형편이 되느냐며 이런저런 반대가 심했지요. 그래도 얼굴을 맞대며 토론을 하다 보면 안될 것 같은 상황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기 구호를 외치는 것도 좋지만 남을 정성껏 설득하는 일도 이렇듯 중요합니다.


코디정: 의약분업 시행에도 직접 관여하셨다고 하던데요?


정세균: 네. 옛날에는 의사 처방 없이 약국에 가서 아무 약이나 구할 수 있었어요. 병원에 가면 진료도 받고 약도 받았지요. 의료기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서 약국이 병원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벌써 먼 옛날 이야기가 됐습니다. 항생제와 주사제 같은 의약품 오남용 문제는 국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정치가 꼭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어요. 하지만 워낙 의사와 약사가 팽팽하게 싸우니까 당시 정치인들은 선거에서 불리할까 봐 섣불리 다루지 못했지요.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돼서야 정치가 결심한 거예요. 의약분업이 시행됐습니다. 그때 저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정조위원장이었어요. 의약분업을 시행하기 위한 입법활동은 제가 주로 맡았습니다. 의사들의 반대가 너무 심했어요. 의사들이 정부와 힘겨루기를 했습니다. 큰 시위도 있었지요. 전국의 병의원이 단체로 휴진하기도 했고, 의대생들이 수업거부를 하기도 했어요. 그냥 표 떨어지는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렸습니다. 하지만 정치라는 게 그런 거예요. 설령 정치적으로 불리하더라도 국민을 위해 결단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거든요. 정치인이 결단을 유보하면 누가 결단을 하겠습니까. 가끔은 유불리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코디정: 국회의장을 역임하셨던 분이 국무총리가 되는 경우가 그동안 없었잖아요? 또 처음에는 국무총리가 되지 않으려고 애쓰셨다가 결국 총리 직을 수락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정세균: 저는 기본적으로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이라면 총리가 아니라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세예요. 그렇지만 국회의장까지 했던 사람이 총리를 맡는다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외교부의 ‘의전편람’이라는 게 있어요. 거기에 의전서열이라는 게 나와요. 1번이 대통령, 2번이 국회의장, 3번 대법원장, 4번 헌법재판소장, 그리고 5번 국무총리 순서입니다. 외교부에서 의전을 할 때 이 순서대로 해요. 이게 권력서열을 의미하는 건 아니어도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하니까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국회의 위상도 생각해야 하고요. 2019년 7월 17일 제헌절 아침에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현했을 때였습니다. 김현정 씨가 ‘정세균 국무총리설’에 대해 묻더군요. 현실적으로 그런 제의가 오지도 않겠지만 제의가 오더라도 입법부의 위상을 감안할 때 수용하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그 후로도 사람들이 물으면 ‘택도 없는 일’이라고 반응했지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의가 ‘현실적으로’ 왔습니다. 


코디정: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요?


정세균: 위와 같은 이유로 거절하면서 정중하게 다른 분을 추천했지요. 하지만 그게 잘 안 되었어요. 일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갔습니다. 대통령의 제안을 받고 고심한 끝에 나라를 위해 내가 소용된다면 자리의 높낮이를 따지지 않는 것이 공직자의 도리가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국무총리 일을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코디정: 그때 국무총리로서의 포부 같은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정세균: 국무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를 준비하는 동안 제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었지요. 경제총리가 되자, 사회를 통합하는 총리가 되자. 경제 활력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적극행정’을 해야겠다, 정부가 먼저 과감하게 규제를 혁신하자, 경제 살리기에 혼신의 노력을 다하자, 기업하고 싶은 환경을 만드는 데 사활을 걸어야겠다, 이것이 첫 번째 생각이었습니다. 갈등과 분열을 좀 줄이려면 진정성 있는 소통을 해야 하지 않겠나, 소통과 대화로 사회 통합을 이뤄내자,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마음을 경청하고 서로 대화하는 모델을 만들어야겠다, 이것이 두 번째 생각이었습니다. 통합과 경제, 이 두 가지는 제가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경제를 살리고 사회를 통합하는 일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제가 마땅히 짊어질 시대적 사명이라고 여겼던 거지요. 


코디정: 그렇지만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지요.


정세균: 네. 취임 후 일주일도 안 되어 첫 번째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습니다. 1월 20일의 일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코로나19가 세계적 대위기를 초래할 무서운 바이러스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코로나19에 발목이 잡히리라고는,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제대로 못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코디정: 2월에 대구에서 신천지 교도 중심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될 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정세균: 2월 18일이었을 거예요. 대구에서 코로나19 첫 감염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유명한 31번 확진자입니다. 신천지 교회 신도였고, 집단감염이었습니다. 감염자 수는 계속 늘어났습니다. 2월 22일 대구에 갔습니다. 그날의 풍경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완전히 빈 도시였습니다. 번화가인 동대구역 앞에는 사람 한 명 지나다니지 않았습니다. 상가도 모두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하필 비도 좀 내려서 처량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가 우리 대구가 중국의 우한시처럼 되는 게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 들더군요. 이거 어떻게 하지? 아비규환의 도시를 떠올려 보는데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총리라는 사람이 몸으로라도 막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서울로 올라와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이하, ‘중대본’)를 설치하고 총리인 제가 직접 본부장을 맡았습니다. 중대본 본부장을 국무총리가 맡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코로나19 위기경보를 ‘심각’으로 격상하고 범정부 차원으로 더 강력하게 대응하는 시스템을 만든 다음에, 다시 대구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총리인 내가 직접 대구에 가서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특히 부족한 병실 문제를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대통령께 전화했지요. 아무래도 대구에 가야겠다고요. 내가 대구에 머물면서 이 상황을 정리해야 될 것 같다고요. 그랬더니 대통령께서 걱정하시더군요. 가는 건 쉬워도 나오는 건 어렵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으면 나오기 힘들 거라고요. “그래도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대통령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바로 대구에 갔습니다. 그때가 2월 25일이었습니다. 감염병과 싸우러 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싸움터에 가는 사람이 고급 호텔에 머물 수는 없으므로 대구은행 연수원 낡은 방에서 짐을 풀었습니다. 당시에는 내 기어이 이 상황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3주 동안 머물며 대구 시민들과 함께 감염병과 싸웠지요. 그리고 이겨냈습니다. 당시 대구를 봉쇄해야 한다는 얘기도 있었잖아요? 대구시장을 포함해서 여러 대구 사람들이 제게 이렇게 말했어요. “총리 님은 절대 우리 대구를 떠나시면 안 됩니다. 총리 님이 이곳에 계시니까 대구를 봉쇄하지는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라고요. 전혀 걱정하지 말라고, 여러분과 함께 있을 거라도 답했지요. 그때의 심정을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코디정: 대구에서 머무시면서 임시 병동을 확보하려고 총리께서 직접 기업에도 전화 돌리고 그러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정세균: 그때 경증 환자를 수용할 의료 시설을 확보해야 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의료법은 병원이 아니면 입원을 못 시킵니다. 새로운 제도를 찾아야 했지요. 그때 도입한 임시 병동이 바로 ‘생활치료센터’였습니다.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연수원을 생각해냈습니다. 어차피 코로나19 때문에 연수를 못 하니까 그곳을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였습니다. 워낙 다급한 일이어서 총리인 제가 직접 진두지휘를 하면서 임시 병동을 확보해야만 했습니다. 저도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서 협조를 구했지요. 자기들 좋은 연수원을 코로나 환자 병실로 쓰는 걸 누가 좋아하겠어요? 총리가 전화를 거니 일이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경주에 있는 현대자동차 연수원은 현대자동차 직원들도 가보지 못한 곳입니다. 아주 간곡히 요청한 끝에 완공과 동시에 생활치료센터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전국 곳곳의 의료인력을 생활치료센터에 배치했지요. 


코디정: 임시 병동 문제, 마스크 문제, 선별 진료소 등등 그런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면서 우리 정부가 소위 ‘K 방역’ 표준을 만들어 냈잖아요? 그때의 심정은 어땠습니까?


정세균: 코로나19에 선진국도 쩔쩔매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잘 싸우고 있는 것이구나, 이야 선진국도 별것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위기를 잘 극복해서 국가의 격을 올려야겠다고도 생각했지요. 우리 국민도 전 세계 상황을 다 지켜봤잖아요?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의 품격이 올라가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의료진과 공직자의 노고가 있었습니다.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코로나19라는 미증유의 위기 극복을 위해 우리 국민은 서로 배려하고 서로 연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러 지자체와 기업이 적극적으로 협조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 전대미문의 위기 속에서도 오히려 우리 대한민국의 국격이 높아진 것이지요. 실제로도 뭔가 달라졌어요. 뭐든지 미국은 어떻고 영국은 어떻고 독일은 어떻고 했던 지난날의 관습적인 생각에서 오히려 우리가 세계의 모범이 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얻게 됐지요. 생활치료센터, 마스크 5부제, 드라이브 스루 같은 창의적인 생각이 글로벌 방역의 표준이 되는 것을 우리가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코디정: 그런데 유엔참전용사에게 마스크를 제공하자는 건 누구 아이디어였어요? 당시 우리 국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자랑스러운 기분이 들었거든요. 


정세균: 제가 아이디어를 냈지요. 2020년은 6.25 전쟁 7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원래는 생존 유엔참전용사를 국내로 초청할 계획이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사업이 제한되었지요. 그때 제가 그분들에게 마스크를 주자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난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좀 형편이 나아지기 시작했을 때였어요. 우리도 충분하지 않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마스크가 좀 남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건 내가 실물경제를 좀 아는 사람이니까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거예요. 수요라는 게 갑자기 없다 생기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생산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가보훈처장에게 제안했습니다. 참전용사에게 마스크를 보내자고요. 우리 대한민국이 70년 전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고, 당신들을 기억하고 여전히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담은 마스크였습니다. 미국을 포함한 22개국 참전용사들에게 100만 장의 방역 마스크를 보냈어요. 미국에 가장 많이 보냈지요. 그때 미군 용사들이 가장 많이 참전했거든요. 그 고령의 용사들이 코리아가 자신들을 잊지 않았다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거 아녜요. 실은 우리가 고맙다고 눈물을 흘려야지요. 


코디정: 이재명 지사가 기본소득론을 주장하고 있고,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정세균: 돈 나눠준다는데 그걸 싫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기본소득이라고 하려면 ‘소득’이라고 하니까 어느 정도의 돈은 돼야 하는 거 아녜요? 생활비로 쓸 수 있는 정도여야 하고요. 그런데 그 돈이 어디에 있는가, 이게 문제이지요. 돈을 나눠주는 거야 좋지만 정부가 그런 큰돈을 갖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우리나라는 복지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복지제도는 정부가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지원해 준다는 취지로 만들어져 있어요. 이런 제도 속에서 어려운 사람이나 어렵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이 일률적으로 돈을 지급한다면 지금의 복지제도를 모두 다시 설계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지요. 한두 번은 줄 수 있을지 몰라요. 하지만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소득 실험은 있었으나 그걸 제도화한 나라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국가가 나눠주는 돈을 좋아할지라도 우리 국민들이 그런 돈까지 탐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복지제도를 잘 정비하면서도 고통이 있고 국민의 눈물이 있는 곳에 국가의 재정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코디정: 우리나라 정치 문화는 어떻습니까? 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환멸감이 적지 않아요. 


정세균: 아시다시피 우리 정치는 품위가 너무 없습니다. 마치 양아치 세상과 별 차이가 없는 것처럼 느낌을 주는 게 우리 정치판입니다. 염치도 체념도 인정머리도 아무것도 없는 판이거든요. 아마 깡패집단 빼놓고 정치인보다 말을 험하게 하는 집단이 없을 거예요. 깡패집단도 욕이나 좀 하지 남의 마음을 후벼 파고 모욕하고 뒤집어씌우고 그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정치가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큽니다. 정치인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처신하고 말하느냐에 따라 사회가 달라집니다. 언젠가 은퇴를 하면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좋은 정치인을 양성하는 정세균 정치학교를 열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코디정: 이런 정치 문화에서 어떻게 적폐청산이 가능할까요? 적폐청산에 대한 입장은 무엇입니까?


정세균: 요즘 회자되는 소위 ‘적폐청산’을 매우 찬성합니다. 옛날 정권에서 일어난 여러 분야의 잘못된 관행이나 허물, 부조리들을 한번 정리하고 넘어가자는 것이지요. 특히 권력기관의 권한남용을 포함해서요. 그러나 적폐청산의 방식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달라요. 나는 남의 허물을 지적할 때에는 너무 큰소리로 하지 말고, 개망신 주지 말고 조용히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누군가를 탓하면서 비참하게 만들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아이들을 나무랄 때에도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면 반발심을 일으키잖아요. 적폐청산이 너무 시끄럽고 요란해서는 오히려 적폐청산에 이롭지 않은 거예요. 적폐세력은 그 요란함을 반기면서 갑옷을 입거든요. 자기들도 시끄럽게 저항할 수 있는 구실이 생기니까요. 적폐청산, 필요합니다. 눈 감고 넘어가지 말고 따질 것은 따지고 지적할 것은 지적하면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해요. 하지만 확실히 매듭짓기 위해서는 조용하게 처리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코디정: 어떤 정치가 좋은 정치인가요?


정세균: 저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그래도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는 게 ‘정치의 본령’이라고 보는 입장이에요. 선명성을 내세우다가 아무것도 못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는 게 저의 소신이고요.


코디정: 이것이 정세균의 정치다, 라고 비전을 담아 말하신다면?


정세균: 우리 미래 세대가 지금 우리 세대보다 더 잘사는 나라, 이것이 정세균의 정치입니다. 


이상은 길고 긴 인터뷰의 일부였습니다. 

더 자세하고 풍부한 내용은 정세균 지음 <수상록>(이소노미아, 2021. 4. 15. 발행)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 정치인 책의 모범과 기준을 만들겠다는 포부로 기획하고 편집해서 93편의 에세이집으로 묶어 펴낸 책이 바로 <수상록, 정세균 에세이>입니다. 



 
Previous
Previous

평범함이 아름다운, 우섬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