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스트답게 아라베스크하게

우리는 외딴 점이 아니다. 나와 당신은 선분 안에 있다. 면적이나 부피를 갖는 덩어리 속 어딘가에서 우리는 함께한다. 그것을 네트워크라고 하고 플랫폼이라고 부른다. 이미 어딘가에서 당신과 나는 만났다. 실제로 만난 적이 있는가와는 상관없는 인연이다. 그 인연의 대가로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받았다. 

나는 부암동 어느 지번의 건물에 세 들어 산다. 그곳은 내 육체의 쉼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내 생활은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카카오톡, 유튜브, 그리고 수많은 애플리케이션. 이곳은 공짜다. 육체들의 세계와 달리 공평하다. 대가라고 해 봤자 뭔가를 내놓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우리들의 풍요로운 자원이다. 사람들은 플랫폼에 접속해서 시간을 쓴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더 많은 시간을 써서 콘텐츠를 만들고 존재감을 과시한다.  


하지만 시간을 쓸수록 우리는 개성을 잃는다. 플랫폼에서는 타인이 범람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과잉은 실제로는 타인의 과잉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쓴다. 플랫폼은 ‘타인을 향한 관심’을 개인에게 요구한다. 이 요구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은 고독에 빠진다. 초연결사회에서 고독이라니.


물론 예외는 있어서 이곳에서도 개성을 유지하는 극소수의 사람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플랫폼에서 개성을 잃는다. 개성을 잃는다고 해서 인생이 망가지는 건 아니지. 뭘 그리 심각하게, 뭘 그리 인색하게 굴어? 이리도 즐겁게 세 들어 살고 있는데 개성쯤은 대가로 플랫폼에 지불해도 되는 거 아냐? 그래, 너도 그렇게 생각하니? 나도 그렇게 생각해. 편리한데 뭘. 보잘것없는 내 개성을 따져 봤자, 귀찮기만 하겠지?


2020년 가을로 접어든 어느 날이었다. 아이브의 송주환 씨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를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는 나에 대해 조사를 끝낸 상태였다. 불쑥 찾아온 그가 내게 플랫폼으로부터의 자유를 제안했다. 개인 브랜딩이었다. 닷컴정신의 부활이기도 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이 무슨 개인 브랜딩? 그냥 플랫폼을 숙주 삼아서 기생하면 되는 거지 뭘, 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거절했다. 하지만 시대에 역행하는 송주환 대표의 노력이 인상적이었다. 마치 타인의 규범에서 벗어나 개성을 회복하려는 모더니즘 운동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여전히 나 같은 놈이 무슨 브랜딩, 하고 넘어갔다. 사회적으로 좀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그런 ‘무브먼트’를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잊었다.


정치인이라면 모를까? 그 무렵 나는 두 사람의 정치인의 책을 편집하고 있었다. 두 분 모두 대단한 명성과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치인이었다. 송주환 씨의 제안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플랫폼에 기생하지 말고 개인 브랜딩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플랫폼에서 벗어나 오바마닷컴, 바이든닷컴 같은 사이트를 만들고, 또 그것을 위해 자기를 질서있게 정리하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럴 필요성을 보좌관에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메시지가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듣기 싫은 법이지. 개념을 설명하는 것부터가 싫다. 세상은 이렇게나 익숙한데 무슨 새로운 실험인가. 나는 낙담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기 눈으로 실체를 봐야만 그제야 비로소 깨닫겠지. 하지만 세상을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좀 달라야 하지 않는가?


그때 나는 결심했다. 내가 먼저 탈주하기로, 그래서 이 탈주의 자유를 그들에게 보여주기로. 모더니스트가 되자. 불가능한 꿈을 꾸자. 플랫폼에서 벗어나 지금까지의 연결을 해체하자. 내 개성을 닷컴으로 구축한 다음에 재연결하자. 그리고 소통하자. 모더니스트는 타인의 노예가 되는 것을 경멸받는 것으로 간주한다. 나는 나의 개성이다. 내 개성은 내가 만들어내는 아라베스크다. 


모더니스트답게 아라베스크하게, 코디정은 개성을 찾아 과거로 돌아간다. 다시 시작한다. 이것이 나의 텔레그래프다.

 
Previous
Previous

우주적 위로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