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에서 인류애까지

과학자들이 인간의 호르몬을 연구했다. 그들은 테스토스테론이나 에스트로겐의 분비량이 어떻게 극적으로 증가하는지를 관찰했다. 몇 주 내지 몇 달 후에는 호르몬이 감소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뇌과학자들은 페로몬,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세로토닌이 어떻게 인체를 자극하는지 연구했다. 이런 호르몬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1년 반 혹은 3년까지 지속된다고 한다. 그들이 연구한 것은 ‘사랑’이었다. 1993년 015B가 부른 노래에 나오는 ‘우리가 느낀 싫증’이 호르몬 때문이라니. 


고작 호르몬이라니. 차라리 그것보다 훨씬 작은 전자라고 하지. 그렇다면 사랑을 양자역학으로 분석해 보는 신묘함이 생길 게 아닌가. 내가 좋아하는 과학은 언짢은 학문이 아니다. 자연에 감탄하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지식이다. 사랑에 관한 화학작용론은 인간을 기계로 간주한다는 점에서는 과학이겠다. 그러면 고장난 ‘기계’ 수리에는 유용하겠지. 그런데 고장난 사랑을 호르몬으로 수리할 수 있을까? ‘처음에 만난 그 느낌 그 설레임’을 찾기 위해 호르몬을 섭취?


과학은 안되겠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은 적이 있다. 재미있었다. 나는 자꾸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저자에게 내 감탄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런데 어머나, 지금에 와서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 내가 무엇을 읽은 것이었을까? 그때 그 활자들은 내 머릿속에서 어디로 휘발된 것일까? 혹시 모른다. 대뇌 속 어느 신경망 다발이 프롬 할아버지의 충고를 저장하고 있을지. 하지만 직립보행을 하는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기술’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자본주의 사회에 길들여진 나는 돈으로 기술을 산다. 기술을 사지 않고 책으로 읽기만 했기 때문에 그 기술이 내 것이 되지 못한 것일까?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고, 그러므로 사랑의 기술도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게으르게 결론을 내렸다.


그다음 나는 종교에 기웃거렸다. 


하나같이 옳고 멋진 말씀이었다. 하지만 종교는 감정을 통제해야 했고, 그런 걸 호르몬이 싫어했다. 불교의 자비의 경우,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는 게 좋겠다. ‘남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덜어주려는 마음’. 이 정도면 호르몬도 만족해하니까. 더 깊이 들어가면 출가하기 전에 집에서 쫓겨난다. 기독교는 표면에 닿자마자 쑤욱 빠져버리는 교리가 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의 말씀을 듣자니 이런 얘기였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건 조폭도 할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런 사랑이 무슨 대수냐고, 그러니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씀. 이게 당최 가능한 이야기인가. 내 인체의 모든 호르몬이 거부감을 표시했다. 


이렇듯 종교를 한번 거치고 나니 사랑 공장 호르몬들이 침묵한다. 이번에는 호르몬이 결코 놀 수 없는 ‘재미없는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철학이었다. 


불교가 가르치는 자비심은 결국 공리주의가 염원하는 마음이었음을 알았다.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고 고통을 줄여주는 것이야말로 공리주의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행복까지 증진하는 사랑이라니, 멋있어 보였다. 그러다가 칸트를 만나고서는 내 호르몬이 몽땅 철퇴를 맞고 말았다. 칸트 할아버지가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해설하는데 황홀경이었다. 생각의 지평이 화악 넓어졌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때의 그 사랑은 감정, 그러니까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행동의 문제라는 것이고, 그 행동을 낳는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며, 그 의지의 발원지인 이성이라는 말씀이시다.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서 한편으로는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는 우리 속담이 떠올랐다. 그게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에 오버랩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무력’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냈다. 한 차원 높은 사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호르몬의 지배를 받는 사랑이라니, 얼마나 낮은 수준인가. 호르몬이 판치지 못하는 그런 사랑을 한번 해 보자. 그 후 내가 달라졌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대화를 하고 관심이 없을지라도 서로의 일과를 묻는다. 습관적으로 약속하고 서로를 위해 봉사한다. 눕기보다는 앉고 앉기보다는 일어나서 움직인다. 감정을 주고받지 않으니 편안하고 명료하다. 의무력이 커질수록 호르몬에서 벗어난 사랑을 한다. “DUTY is the DEATH of LOVE.”라고 말이 있다. 필경 사랑을 육욕과 감정 안에 가두려는 호르몬의 속삭임이니 무시하셔도 좋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가부장제 문화의 가장 큰 문제는 집안에서 남자의 의무량을 절대적으로 줄여 놓았다는 거, 그래서 남자들이 자기 가족을 더 높은 수준으로 사랑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거. 또 근래에는 ‘인류애’라는 아주 거창한 이상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냥 그게 내 의무라고 생각하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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