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숨결을 보라, 김석희


ECCE ANIMA KIM SEOKHEE, 2021-08-18


  • 경희대학교 국제지역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일하면서 번역가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석희 박사를 만났습니다. “언제나 지금이 좋아요. 젊음이라는 게 시행착오가 있잖아요?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이 내가 된 거고요. 그걸 안 거치고 올 수는 없는 거니까…. 지금이 그 젊음의 대가인 것 같아요.”


코디정: 축하드려요. 최근 <빛 속으로> 번역 작품을 펴내셨잖아요?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김사량’(1914~1950)이라는 소설가를 알게 됐어요. 책을 읽으면서 마치 1930년대의 시대상과 당시 조선 사람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어요. 역시나 훌륭한 번역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사량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으셨잖아요? 이번 책은 굉장히 뜻깊으실 것 같아요?

김석희: 네. 석박사 과정을 김사량 문학으로 마쳤으니 제가 국내에 몇 안 되는 김사량 연구자이긴 해요. 김사량은 경계에서 문학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어요.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했을 정도로 엘리트였고요. 조선어로도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저는 일본어로 쓴 작품이 더 좋아요. 일본문단에서도 인정을 받았고 그가 쓴 소설이 아쿠타가와상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저항문학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때 친일문학자로 분류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 머물며 활동했어요. 친북작가로 분류되니 오랫동안 남한에서는 ‘금서’가 되었습니다. 백석의 시가 금서였던 것처럼요. 제가 김사량을 만난 지 2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요. 박사학위를 받으면 김사량은 이러저러하다라고 평가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부끄럽게도 박사학위를 받은 지 15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굵직한 결론은 내리지 못하고 있었어요. 이번 번역 작업을 통해 이렇게 김사량이 쓴 소설 몇 편을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코디정: 이번에 특히 어떤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번역하셨나요?

김석희: 그동안 많지는 않아도 여러 선배 연구자와 번역가들이 김사량 문학을 번역해 왔어요. 훌륭한 번역들이었어요. 하지만 초기 번역들에는 오류가 많았어요. 그 이후 이어진 연구자들의 번역 중에는 굉장히 좋은 번역도 있었고요. 하지만 김사량 문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번역들이어서 주석이 많았고 가독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었어요. 연구자들의 언어와 관심사가 모두 대중적일 수는 없잖아요? 저는 가급적 쉽게 김사량 문학을 일반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번 번역 과정에서는 ‘가독성’이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어요.


코디정: 가독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책의 장점도 보이는 걸요? 가독성만으로 소설이 살지는 않잖아요? 마치 영화처럼 독자의 심상에서 이미지를 펼쳐내는 듯한 번역이었어요.
김석희: 소설에 등장하는 소품을 통해 독자들이 그 당시의 시대상을 느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봤어요. 그래서 당시 소품의 이미지가 독자에게 잘 전해질 수 있도록 세세한 부분에 더 신경을 쓰면서 번역했던 것 같아요. 강원도 산간지역을 배경으로 한 단편에서는 제 고향 강원도 사투리로 일본어를 번역했습니다.

코디정: 이번 책의 제목이 된 단편 <빛 속으로>는 일본어로 <光の中に>입니다. 기존 다른 출판사에서는 <빛 속에>로 번역했더군요. 제목을 보면서 아, 김석희 선생이 이거 엄청 고민하셨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석희: (웃음) 어떻게 알았어요? <光の中に>는 ‘빛 속에’로 번역해도 좋고, ‘빛 속으로’라고 번역해도 좋아요. 어느 쪽을 선택할지 정말 고민했어요. 고민 끝에 동적인 움직임이 느껴지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코디정: 아쉬운 점이 있다면요?

김석희: 김사량은 당시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을 넘나드는 활동을 한 사람이에요. 독자들에게 1930, 40년대 그 시대를 제대로 체험할 수 있는 특권을 줄 수 있는 작가입니다. 그래서 동아시아 3국의 도시 풍경을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단편을 선정하는 과정에서 우리 경성과 일본 동경 그리고 중국 북경의 모습을 전할 수 있는 작품을 골랐어요. 경성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동경을 보여주는 소설, 그리고 북경을 그린 소설을 각각 선정했어요. 그런데 편집과정에서 북경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이 빠지게 됐어요. 그게 매우 아쉬워요. (인터뷰이는 <향수>라는 제목의 출력물을 찾아 인터뷰어에게 전한다) 이거예요. 나중에 시간날 때 한번 읽어봐 주세요.


코디정: 네. 근데 어째서 빠지게 된 걸까요?

김석희: 그건 출판사가 결정하는 문제여서 제가 존중해요.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김사량은 논란이 있는 복잡한 작가예요. 주로 일본어로 문학을 했고,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활동한 작가니까요. <향수>에는 적나라한 표현들이 있어요. 마치 일제를 찬양하는 듯한 문장이에요. 그래서 친일파 문학처럼 여겨질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그가 경계에서 문학을 했지만 근본적으로 제국을 칭송하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어쨌든 아쉽지요. 언젠가 이 단편도 출간할 수 있었으면 해요. 김사량의 소설도 다른 작가들의 경우처럼 일제 당국에서 검열을 받았어요. 검열 당국에 의해 삭제된 문장이 적지 않고 무엇이 삭제되었는지는 지금도 전부 알 수 없어요. 언제 체포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는 기록도 있고요. 또 김사량 자신도 검열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기도 했어요. 그런 복잡한 사정이 있었어요.


코디정: 아쉽겠어요. 그런데 일본에는 김사량 전집이 있잖아요? 우리나라에도 있나요? 전집이?
김석희: 아쉽지만 없어요. 여기저기 조금씩 나와 있기는 해도 한 질로 묶은 전집은 아직 없어요.

코디정: 나중에 제가 재정적인 역량이 되면 김사량 전집을 출간하겠습니다. (웃음) 박사님이 번역하신다면요.
김석희: (웃음) 와? 그럼 완전 영광이지요. 약속해 주시는 거예요?

코디정: (웃음) 어디까지나 그럴 역량이 있다는 전제에서요.
김석희: 말씀만으로도 기분이 좋네요.

코디정: 화제를 바꾸겠습니다. 50대 인생이시잖아요? 어때요 50대 인생?

김석희: 글쎄요. 지금까지는 특별히 나이 먹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60대가 되면 어떨지 잘 모르지만요.

코디정: 질문을 좀 바꿔 보지요. 예를 들어 20대 청춘과 혹은 30대 등의 시절과 비교해서 어떤 인생이 더 마음에 드는 것 같으세요?
김석희: (웃음) 저는 그냥 지금이 좋아요. 특별히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적은 없었어요. 언제나 지금이 좋아요. 젊음이라는 게 시행착오가 있잖아요?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지금이 내가 된 거고요. 그걸 안 거치고 올 수는 없는 거니까…. 과거로 되돌아간다 한들 비슷한 선택, 비슷한 실수를 할 것 같아요. 지금이 그 젊음의 대가인 것 같아요.

코디정: 지금 이 시간이 ‘젊음의 대가’라는 표현이 좋네요.
김석희: 네. 그래서 저는 지금이 항상 좋아요. 인생에는 고단함을 지나 회복되는 시간들이 와요. 그런 점에서 나이 들어가는 것도 좋아요. 싫지 않아요.

코디정: 그렇다면 지금이 인생의 전성기인가요?
김석희: (웃음) 아직 오지 않았어요. 그러나 지금이 전성기일지도 모르지요.

코디정: (웃음) 아까 강원도. 출신이라고 하셨잖아요?
김석희: 네 평창이요. 미탄면이라는 곳이에요.

코디정: 미탄이 어디쯤이죠? 예전에 정선에 갔을 때 산이 깊고 하늘이 좁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미탄도 그런 곳인가요?
김석희: 미탄은 더 깊어요. 정선에서도 가깝고 영월과도 가까워요. 사방이 산이에요. 그런 곳에서 자라다 보니 나중에 서울로 올라오면서 뻥 뚫린 곳을 처음 봤을 때 깜짝 놀랐어요. 이런 동네들이 있구나, 하면서요.

코디정: 서울에는 언제 올라왔나요?
김석희: 일곱 살 때 가족 전체가 상경했어요. 저희 3남매 교육 때문에 부모님이 결정한 거죠.

코디정: 그럼 고향 미탄에 대한 기억은 일곱 살 이전 기억이군요? 저는 유년 기억이 거의 없어서 그런 기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무척 부럽더라고요. 신기하기도 하고요.

김석희: 어릴 때의 좋은 기억은 오래 남는다고 해요. 고향은 어린 저한테 매우 특별한 기억을 남겨줬어요. 제 첫 번째 기억은 세 살 어린 여동생이 태어나던 날이었어요. 생생하게 기억 나요. 동생이 태어났을 때의 집안 풍경이. 저희 집 바로 옆에는 미탄초등학교가 있어요. 그리고 건너편에는 파출소가 있었고요. 우체국도 있었어요. 다 기억이 나요. 서울약방이라는 간판까지 기억나는 걸요. 장이 들어서는 날에는 사람들이 모이는 그런 마을이었어요. 마을을 둘러싼 산의 풍경과 개울가에 흐르는 물과 그곳에 부인들과 아이들이 모여드는 빨래터까지 내 머릿속에 남아 있어요. 강원도 산골 사람들의 사투리까지요.

코디정: 아, 저는 ‘강원도 시골에서 자라난 아가씨, 서울로 상경하다’라는 이미지로 박사님을 생각했던 거였는데 그게 아니었군요.
김석희: (웃음) 사람 보면 그런 느낌이지요? 어렸을 때 강원도 기운이랄까, 그런 게 저한테 분명 강하게 남아 있어요. 강원도 미탄은 제 인생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코디정: 도시에서 자라나는 저한테는 기억할 멋진 풍경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마음속에 풍요로운 자연을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부럽더라고요. 가난하고 고무신 신고 다니더라도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요.
김석희: (웃음) 저는 고무신 신고 다니지 않았어요. 샌들을 신었죠.

코디정: (크게 웃음) 아, 황순원의 <소나기>에 나오는 그 소녀였군요
김석희: (크게 웃음) 그런데 친구들이 너도나도 샌들을 한번 신어 보자고 했어요. 친구들에게 샌들을 줘버리고 고무신 신고 집에 돌아와서는 엄마한테 혼나기도 했지요.

코디정: 가족 분위기가 따뜻했던 것 같아요?
김석희: 비교적 따뜻했어요. 아버지는 집안에 관심이 별로 없었지만 엄마는 저한테 기대가 컸어요. 여동생과는 거의 안 싸우고 자랐어요. 사이가 좋았어요. 남동생과는 나이 차이가 있으니까 다툴 일이 없고요. 형제 관계는 매우 좋은 편이었어요. 화목했어요.

코디정: 서울에서는 어디에 정착하셨나요?
김석희: 동대문구 답십리. 이곳저곳 이사하면서 살았어요.

코디정: 서울에서 보낸 유년 생활은 어땠나요?
김석희: 그 시절도 다 기억 나요. 시골에 살 때에는 잘사는 편이었는데 서울에 올라와서는 힘들었어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엄마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몸도 많이 상하셨고요. 당시 어린 나는 책을 좋아했어요. 그런데 마음껏 책을 살 형편은 안 되었거든요. 초등학교 친구 중에 쌀집 딸 경희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그 집이 잘 살았어요. 연탄도 팔던 집이었는데 모든 좋은 신간은 그곳에 모여들었어요. 계몽사, 금성사, 세계문학전집, 셜록 홈즈 전집까지 있었어요. 경희한테서 책을 많이 빌려 봤어요. 하루에 3권씩 빌리기도 했어요. 소년탐정칼레 시리즈 같은 책도 읽었던 것 같아요. 하도 책을 빌려 보니까, 어느 날 경희 엄마가 저희 엄마한테 책 좀 그만 가져가게 하라고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어요. 그런 일이 있어도 우린 무슨 비밀스런 일을 하는 것처럼 창문을 통해 책을 주고받곤 했어요.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도서관도 다니고 서점도 다니고 했어요. 동네 영남서점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어요. 고등학생이 돼서는 인사동 초입에 있던 새마을 도서관인가 하는 곳에 자주 다녔어요.

코디정: 답십리에서 인사동?
김석희: 고등학교가 무악재에 있었어요. 당시 살던 석관동에서 무악재까지 1시간을 넘게 버스 타고 통학했거든요. 인사동은 그 중간 지점에 있어서…

코디정: 박사님의 이력 중에서 특별한 사항이 있어요. 인문계 고등학교가 아닌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셨어요. 거기가 중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학생만 입학할 수 있는 특별한 학교잖아요?

김석희: 네.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녔어요. 집안 형편이 어려웠어요. 제가 대학에 가는 건… 아무래도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빨리 취직해서 엄마를 도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말이죠. 속 모르는 중학교 선생님 중에는 그것도 모르고 넌 그림에 재능이 있으니까 서울예고에 진학하라고 하는 분도 계셨어요. 공부를 잘하니까 대원외고에 가라는 분도 계셨고요. 어쨌든 저는 실업계를 선택했어요.

코디정: 아, 지나친 ‘장녀 책임감’ 때문이군요.
김석희: 그럴 수도 있겠네요.

코디정: 그래도 지금은 일본에 유학 가서 박사 학위까지 받고 돌아와 교직에서 근무하시니 인생은 결국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을 운명적으로 찾아내는 것 같아요.

김석희: 그래도 후회는 해요. 선택이 아쉽다는 생각도 하고요. 너무 많이 돌아왔어요. 너무 많이 에너지를 낭비했으니까요. 실업계가 아닌 인문계에 진학해서 단계를 밟았더라면 더 쉽게 진학할 수 있었을 테고 이후의 삶도 더 쉽게 풀렸으리라 생각해요. 제 커리어 쪽에서요. 어쨌든 서울여상을 졸업한 다음에는 당시 서소문에 있던 삼성엔지니어링 경리부서에 취직했어요. 4년 일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도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퇴사했어요. 삼성엔지니어링 본사는 지금의 동화면세점이 있는 광화문으로 옮겼으니까 서소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광화문에서 퇴사한 거네요.

코디정: 힘들지 않으셨어요? 어린 나이에 대기업 본사에서 일하시는 게.
김석희: 힘들었어요. 일이 많았거든요. 새벽 4, 5시에 일어나서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고된 노동이었어요.. 이런 날이 반복되니 몸이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퇴사한 다음에 들은 얘기인데, 제 후임으로 사원을 3명이나 뽑았다는 거예요. 제가 그동안 3명이 하는 업무를 혼자 했던 거였지요. 그 소식을 들으니 좀 분한 마음이 들더군요. (웃음)

코디정: (웃음) 듣는 제가 다 분하네요. 퇴사한 다음 대학에 진학한 건가요?
김석희: 전문대학에 진학했어요. 당시 대학입시가 저한테는 매우 어려웠어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데다가 학창시절에는 학교 수업 외에는 그림만 그렸거든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겨를도 없었고 엄두도 못냈으니까요. 그래서 서일대학에서 일본어를 전공하고 졸업한 후에 다시 취직했어요. 이번에는 삼성건설로요.

코디정: 아주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잘도 들어가셨군요. 공부에 대한 열정만 없었다면 사회에서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셨을 것 같아요.
김석희: (웃음) 1년 다니다가 다시 공부를 선택했어요. 아시는 것처럼,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로 편입했습니다.

코디정: 아, 드디어 일문학과와 운명적인 조우를 하게 됐군요. 그때 박유하 교수를 만난 것이군요?

김석희: 네 3학년 때 박유하 교수님을 만났어요. 뭔가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박유하 교수님 강의와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의 번역을 통해 가라타니 고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분의 사상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일본 사상계에도 이런 사람이 있구나 하면서요. 그러고 보면 저는 문학 자체보다 문학을 포함해서 사유하는 걸 좋아했던 것 같아요. 하나하나 스스로의 힘으로 생각해 가는 그런 과정을 즐겼던 것 같아요. 설령 그 깊이가 대단하지 못하더라도요.

코디정: 그때 박유하 교수께서 많이 도와주셨나요?
김석희: 네. 많이 도와주셨어요. 대학원에 입학한 이후 그 석사과정 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 때였는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정말 많이 도와주셨어요. 학비를 보태주신 적도 있고요. 언제든 와서 책 보고 공부하라면서 연구실 키를 내어 주셨어요.

코디정: 그런데 아까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을 접하고 충격을 받으셨다고 했잖아요? 그 충격이 대학원 진학으로 이끌어준 건가요?

김석희: 음… 대학원은 몇 년 후에 진학했어요. 제가 4학년 말에 결혼했거든요. 저희 어머니는 결혼식 전날까지 그 결혼을 반대하셨어요. 지금이라도 그만두면 당신이 어떻게든 다 책임져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을 정도였으니까요. 제가 아주 좋아했던 것도 아닌데, 결혼 의지가 막 확고했던 것도 아닌데, 정신 차리고 보니 자석에 끌려가듯 그냥 결혼해서 살고 있더라고요. (웃음)


코디정: 뭔가 귀찮고, 뭔가 여기에서 마침표를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아요. 인생의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싶은 심정 같은.

김석희: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어떻게 아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해 못해요. (웃음) 시댁 생활을 하면서 아이를 낳고 키우는 그 몇 년 동안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어요. 집에서 못 나왔어요.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서 동시에 당뇨로 시력을 잃으신 시어머니 수저에 반찬을 놓아 드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나는 혼자 어딘가 밑으로 계속 꺼져가는 느낌이었어요. 내 인생이 계속 늪에 빠지고 나는 계속 소비되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책으로 공부를 선택했어요. 대학원에 가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어요. 빚을 내야만 했어요. 그리고 그 빚 갚느라 엄청 고생했어요. 그 이후로도 장학금도 받고 조교 생활, 통역, 번역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혼자 힘으로 공부했어요. 다행히 일본 문부성 장학금 유학생으로 선발돼서 아이를 데리고 유학을 갈 수 있었어요. 장학금으로 생활비가 충당이 되었거든요. 그 돈으로 공부하면서 일본에서 아이도 키웠던 것이지요.

코디정: 대학원 성적이 굉장히 좋았을 것 같아요? 그때의 모든 에너지가 성적으로 증명되었을 것 같아요.
김석희: (웃음) ‘올 에이뿔’예요. 악착같이 공부했어요. 18개월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대학원에 가야 했는데 정말 힘들었어요.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네요. 조교 월급이 50만 원 정도였는데 어린이집 비용이 36만 원이었어요. 지금처럼 정부 지원도 별로 없던 시절이었죠. 부족한 학비 충당을 위해 학원에서 중학교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어요. 수학 예습하는 시간이 너무 걸려서 결국 그만뒀습니다. (웃음)

코디정: 초인이셨네요. 아이를 키우랴 공부하랴 그러면서 경제적 자립까지 도모하랴… 그런데 일본에서 몇 년 공부했나요?
김석희: 3년요.

코디정: 아니, 오사카대학에서 3년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던 거예요? 그것도 그 까다롭다는 일본에서? 천잰데.
김석희: 아니 그 정도는 아니에요. 운이 좋았겠지요. 박사 후 과정으로 미국 대학에 갈 기회도 주어졌는데 결국 집안의 반대로 한국에 돌아와야 했어요. 그 선택도 좀 아쉽기는 해요.


코디정: 그 후 귀국도 있었고 이혼도 있었어요. 그 위에 시간이 다시 퇴적됐고요. 그런데 박사님의 그런 고단한 과정은 저한테는 마치 ‘회복의 과정’으로 비쳐졌어요. 그 과정을 다 밝힐 수는 없겠습니다만, 여성의 자립에 대해서는 한마디 말씀해주세요.

김석희: 그래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과정이 힘들었지만 결국 저한테는 인생이 회복되는 과정이었어요. 이혼과 여성의 자립은 그다지 상관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경제적 자립은 여성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예요. 여성뿐 아니라 사람의 인생에서.


코디정: 박유하 교수의 필화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서로 알게 됐잖아요? 이어서 편집자와 번역가로 함께 작업도 했습니다.

김석희: 네. 여러 권의 책을 번역했지만 그중에서도 코디정과 함께 작업한 <소나티네: 나쓰메 소세키 작품집>이 정말 마음에 남아요. 번역료도 지금껏 다른 출판사보다 가장 많이 주셨습니다. (웃음) 제가 번역하고 코디정이 편집한 <소나티네>는 저한테는 선물과도 같은 책이에요. 제 인생은 이 책이 나오기 전후로 나뉘는 것 같아요. 책이 인생을 바꾼 건 아니고 시기적으로 그렇다는 말씀이에요. 그 전에는 제 인생을 살았다는 느낌이 적어요. 뭔가에 이끌리고 주변에 대한 안타까움과 연민으로 내 인생을 연소시켰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은 조금 뽀송뽀송합니다. (웃음) 고마워요. 그때 특별히 공들인 아름다운 표지, 그리고 한 번역자의 삶을 응원하는 책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거 기억하고 있어요.


코디정: 훌륭한 번역을 선물해 주셨으니 제가 더 고맙지요. 그런데 ‘동아시아’를 연구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지금하는 그 연구들은 무엇인가요?

김석희: 동아시아의 근대 전후의 연구, 서양과 동양의 만남이 지역을 중심으로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지방에서는 어떤 식으로 서양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어떻게 근대화가 시작되었는지를 연구해요. 저는 주로 하코다테, 가고시마 같은 일본 지방 중심으로 봐 왔어요. 이게 역사 연구라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사회학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그런 애매한 경계에서 연구를 하고 있어요. 이를테면 ‘지역학’이에요. 제가 속해 있는 <경희대학교 국제지역연구원>에서는 그런 연구를 해요. 국제적이지만 결국 지역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을 추구하는 거예요. 지역과 지역, 예를 들어 사할린 지역과 홋카이도 지역의 교류, 한국의 강원도와 러시아의 어느 지역과의 교류, 이런 식으로 지역과 지역의 교류로서의 국제화예요.


코디정: 음, 근사하게 들려요. ‘지역과 지역의 교류로서의 국제화’라는 메시지가요. 그런데 누가 이걸 주창하는 거예요?

김석희: 아직 정립되지 않은 학문이에요. 저희 국제지역연구원에서 ‘환동해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해요. ‘동해를 둘러싼 지역’이에요. 일본에서는 ‘환일본해학’이라고 부르고요. 코디정이 생업으로 ‘정별’로서 변리사 일을 하는 것처럼, 저도 연구교수로서 환동해학을 연구해요. 하지만 코디정이 자기 좋은 일을 좇아 편집자로 일하고 지금처럼 인터뷰어 활동도 하는 것처럼, 저도 김사량 문학을 포함해서 문학을 공부해요. 번역하고 평론하고요. 저한테는 이게 저의 본질을 구성해요.


코디정: 그런데 박사님의 인생에서 어느 날 ‘호시노 도모유키’라는 일본 소설가가 성큼 등장했잖아요? 호시노 도모유키라는 소설가와의 인연을 잠깐 설명해 주세요. 그분에 대해서도요.

김석희: 2012년이었어요. 호시노가 한국에 와서 두세 달을 살았어요. 그때 처음 인사동에서 만났어요. 그 만남을 인연으로 통역을 도와주기도 했고 그러다가 인연이 깊어지면서 친구가 된 거예요. 당시 제가 인하대학교에서 근무 중이었는데 인하대에 초청해서 강연회도 하고 그랬지요. 그런데 얘기를 하면 할수록 사람이 정말 깊이가 있는 거예요. 굉장히 진솔하고 진정하고요. 인품도 훌륭해요. 그런데 친구로서가 아니라,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호시노 도모유키를 한국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그의 작품은 인품만큼이나 훌륭하거든요. 제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이미 <론리 하트 킬러>, <오레오레> 같은 장편이 번역되어 한국에 소개되어 있었어요. 소설을 통해 일본 사회와 정치를 비판하는 몇 안되는 소설가예요. 그의 독특한 세계관과 훌륭한 문학에 매료되어 그동안 단편들을 번역해 왔어요. 여기저기 알리기도 했고요. 그러다가 그 번역본들과 신작단편들을 묶어 2020년에는 문학세계사에서 <인간은행>이라는 표제로 출간하기도 했어요. 최근에는 신작 번역 <디어 프루던스>에 제가 그림을 그리기도 했어요. 글 호시노 도모유키, 번역/그림 김석희.


코디정: 이분이 오에 겐자부로상을 받은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그 오에 겐자부로.

김석희: 네. 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문학적 후계자라는 식으로 얘기한 적도 있어요. 저는 ‘후계자’라는 말에는 동감하고 싶지는 않고요. 그렇지만 그 정도의 깊이와 레벨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농담처럼 자주 말하는 게 있어요. 호시노 도모유키가 내일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해도 나는 놀라지 않는다고요. 나는 그럴 줄 알았으니까라고요. (웃음) 어쨌든 제가 자신이 있으니까요. 문학으로나 인품으로나. 호시노 도모유키에 대해서는.


코디정: 그런데 호시노 선생의 그 독특한 세계가 독자들에게 어떤 문턱으로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어요.

김석희: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요? 예를 들면.


코디정: 제가 아는 호시노 문학은 박사님이 번역하신 책을 통해서만 알 뿐이고 극히 일부만 보고 있어서 틀릴 수도 있을 거예요. <인간은행>에 수록된 단편을 읽으면서 작가가 만들어 낸 기묘한 세계에서 어떤 공통점을 발견했어요.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낯선 수용력’ 혹은 ‘적응력’입니다. 현실에서는 말도 안 되는 세계가 펼쳐짐에도 등장인물이 하나같이 저항하지 않고 그 세계에 순응하거나 적응해요. 갈등이 폭발하기보다는 어딘가로 증발해 버려요. 사건이 일어나려고 하다가 사건 이후의 세계가 펼쳐지고요. 기존 문법으로는 매우 이질적인 문학이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독자들이 이런 낯섬과 이질적인 면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그래서 저는 호시노에게는 좋은 평론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호시노 문학이 열어내는 지평을 ‘이것이다’라고 쉽게 안내해 주는 그런 평론이 있다면 어떨까, 그런 평론이 독자들로 하여금 호시노 문학에 더 쉽게 입문하고 퍼뜨리는 촉매제 역할을 하지 않을까? 박사님이 그런 역할을 하면 어떨까 싶어요. 친구로서 문학인으로서요.

김석희: 정말 그렇네요. 순응하거나 적응한다고 볼 수도 있겠어요. <인간은행> 같은 경우에도 인간화폐가 된 사람이 오히려 자유가 없는 게 편하다고 말하죠. 사실, 인간이 얼마나 순응하기 쉬운 존재인가를 보여주는 날카로운 비판이기도 해요. 하지만 인간은 또 <스킨 플랜트>에서처럼 멸망직전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살아 남기도 하죠. 그러고 보니 순응과 적응은 참 다른 말이네요. 호시노 도모유키는 굉장히 깊이 파내려가요. 그 사람의 상상력은 바닥까지 파내려가서 뭔가를 긁어내요. 거기에는 분명히 어둠이 있고, 그게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요. 하지만 그 어둠은 우리가 아는 절망하는 어둠이 아니에요. 부드러운 위로가 있어요. 이를테면 부드러운 어둠이지요. 사람을 위로하는 어둠 같은 거. 일본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그의 작품에서 느낄 수 있고요. 그런데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인 차이라든지 정서적인 감흥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인지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는 덜 알려졌어요. 이걸 어떻게 잘 번역하고 평론할 것인가, 이것이 제게 과제겠지요. 한국작가들에게는 크게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만…


코디정: 능력만 된다면 호시노 도모유키 전집을 제가…

김석희: (웃음) 정말요? 그럼 너무 좋지요.


코디정: (웃음) 어디까지나 능력만 된다면요.

김석희: 지금 네 권짜리 콜렉션이 나온 게 있어요.


코디정: 한국에도 나왔나요?

김석희: 아니요. 일본에서요. 일본에서는 계속 이 사람을 조명하고 콜렉션이 나오는데, 한국에서는 그만한 호응이 안되니까 제가 고민인 거예요. 친구로서 역자로서 평론가로서 독자로서요. 한국사회가 호시노를 많이 알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코디정: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으로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떨까요?

김석희: 최근 몇 년 동안 제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 중의 하나가 그림이에요. 10대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어요. 그림을 그리는 게 꿈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수십 년 동안 못하고 말았어요. 이제 다시 그림을 그려요. 앞으로의 인생? 특별한 계획은 없지만, 평론도 하겠지요. 생업도 중요해서. 번역과 연구도 계속할 생각이에요. 하지만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모든 걸 다 접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삶을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지금이 좋아요. 저를 귀하게 사랑하는 사람도 곁에 있고요.


맺음말: 김석희 박사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라틴어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에케 호모ECCE HOMO. ‘이 사람을 보라’라는 뜻의 아주 유명한 문구입니다. ‘호모’는 남성명사이므로 여성명사가 필요했습니다. ‘ANIMA’ 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숨결이나 생명이라는 뜻과, 생명처럼 귀한 것, 정신(soul)이나 마음을 뜻하는 여성명사입니다. 결국 이 인터뷰의 제목은 “에케 아니마ECCE ANIMA”가 되었습니다. <이 숨결을 보라>가 제가 원하는 뜻풀이입니다. 연구자이자 번역가이며 평론가이자 화가이기도 한 김석희 박사가 지금껏 살아온 인생역정을 들었습니다. 그녀의 숨결을 체험한 인터뷰였습니다. 그것은 강원도 산골마을에 불었던 봄바람이었으며, 한겨울 책을 주고받는 창문 안에서 스며나오는 온기였으며, 엄마의 짐을 덜기 위한 땀이었고, 고통스럽게 흐르던 보이지 않는 피였으며, 혼자 힘으로 자기 인생을 회복하고 돌아온 한 여성의 따뜻한 웃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림에 전해지는 김석희 박사의 오래된 숨결입니다. (2021-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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