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트래블링, 조경일


전 국회의원 비서이자 전 국회사무총장 비서관으로 일한 조경일 님을 만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3번이나 탈북,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베트남에서 다시 캄보디아를 거쳐 서울에 도착한 매우 드문 이력의 소유자입니다. 


코디정: 고향을 세 번 떠났지요? 그때 나이가 어떻게 되었지요?

조경일: 네. 열두 살에 엄마와 함께 목까지 차오르는 급류를 몰래 건너면서 한 번, 아버지와 함께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을 때가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로 열여섯에 목숨 걸고 대륙을 종단하고 바다를 건너 한국에 왔습니다. 그렇게 세 번 탈북했습니다.


코디정: 탈북한 다음 어떻게 한국에 들어오셨죠?

조경일: 캄보디아에서 인천공항으로 입국했습니다. 

코디정: 여권은요?

조경일: 사연이 있었어요. 어머니와 누나가 몇 년 먼저 탈북했었거든요. 어머니가 돈을 썼어요. 브로커들을 고용했습니다. 안내자들이지요. 두만강을 건넌 다음에 중국 브로커들의 도움으로 중국을 종단했습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베트남 국경을 건넌 다음에 캄보디아까지 갔어요. 예정대로 잘 되지는 않았습니다. 불법으로 국경을 건너는 게 쉽지 않잖아요? 외국어도 할 줄 모르고 게다가 저는 나이도 어렸고요. 여러 번 실패했습니다. 베트남 정글에서 바닥에 고인 물을 마시며 헤매기도 했고요. 우여곡절 끝에 최종 목적지인 캄보디아까지 도착하는 데 성공했어요. 저희 일행은 다른 탈북 어른들을 포함해서 여섯이었어요. 캄보디아에서 돕기로 한 브로커는 한인 브로커였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사업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저희 어머니한테 예정보다 늦어졌다고 돈을 만 달러 더 요구했어요. 캄보디아까지 자식을 보내는 데 어머니가 돈을 너무 많이 쓰셨기 때문에 브로커가 듣고 싶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브로커가 어딘가로 저희를 데리고 가더니 내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차에서 내렸는데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캄보디아 주재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었어요. 원하는 돈을 얻지 못했다고 저희 탈북한 사람들을 북한 대사관에 넘겨 버린 거였어요.


코디정: 허걱. 경악스럽네요. 돈 얼마 때문에 사람들을 사지로 내몰아요? 그 한인 브로커! 믿을 수 없네. 인간이 어찌 그리 잔인할 수 있을까…

조경일: 그래서 저희들은 완전 낙담하고 말았어요. 캄보디아 국제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북한 대사관 사람들이 다시 와서 북송시키기로 되어 있었거든요.. 이 사실을 안 어머니께서 깜짝 놀라 한국 외교부, 국정원 온갖 곳에 전화를 걸었다고 해요. 도와 달라고요. 자식을 살려 달라고요. 감옥에 갇힌지 18일째 되는 날이었어요. 올 것이 왔어요. 이른 아침이었어요. 감옥에서 나와 저희들 모두 차량에 탔습니다. 이제 저희는 북송될 것이고 끝난 거라고 생각했어요. 어딘가에서 내렸습니다. 양복들이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고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북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정원 사람들이었습니다. 저희를 시내 호텔로 데리고 가더니 짐과 옷을 다 버리게 했어요. 저보고 뭐가 필요하냐고 사주겠다고 하길래 청바지를 입고 싶다고 답했어요. 그때 국정원 직원이 사준 청바지를 입고 그날 저녁에 바로 인천공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코디정: (박수) 국정원이 이렇게나 반가울 때도 있군요. 잘했어, 멋있어, 국정원 요원들! 그때가 언제죠?

조경일: 2004년 9월 23일 아침에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코디정: 세 번 탈북한다는 게...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경이로워요. 하지만 첫 번째 탈북을 했다가 어떻게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 것이죠? 첫 번째 탈북 얘기도 해 주세요.

조경일: 2000년 여름 열두 살 때 처음 탈북했습니다. 1998년 <고난의 행군>이 마지막 피크를 달리던 시절이었어요. 먹을 게 없었어요. 사람들이 많이 굶주려 죽었고요. 학교에 가는 것도 포기했어요. 공부를 하려면 뭔가 먹어야 하는데 그게 안됐으니까요. 산에서 먹을거리를 찾으면서 생활했습니다. 엄마가 세 살 많은 누나를 데리고 먹을거리를 찾아보겠다고 먼저 탈북했어요. 그날 이후 저는 매일 언덕에 올라 엄마와 누나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어요.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다가 탈북한 엄마가 중국에서 잡혀서 북송됐어요. 결국 엄마가 집에 돌아왔지만 곧이어 저를 데리고 다시 탈북했습니다. 아빠는 세상 밖을 모르는 분이셨어요. 게다가 당시 몸살이었고요. 어쨌든 어린 제가 탈북을 ‘선택’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고요. 몰래 새벽비 쏟아지는 날에 두만강을 건너는데 물이 목까지 차올랐어요. 강을 건너다가 물살이 세면 다시 나와서 다른 위치를 찾다가 겨우 강을 건넜습니다. 그렇게 강을 건너다 사람들이 많이 죽습니다. 저희는 운이 좋았지요. 탈북 후에는 조선족 신분으로 위장해서 중국 소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때가 참 좋았습니다. 당시 제 눈에 중국은 너무 잘사는 나라였어요.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중에 밖에서 손님이 왔다는 거예요. 손님? 손님이 올 리가 없거든요. 알고 보니 중국 공안이었습니다. 그렇게 체포돼서 ‘북송’되고 말았지요. 저 혼자만요.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고 저와 엄마와 누나는 뿔뿔이 흩어져 있었거든요. 그래야 안전하니까요. 저는 완전 낙담했고요. 중국 감옥에서 38일, 북한 보위부 감옥에서 사흘 정도 갖혀 있었어요.

코디정: 그렇게 북송됐어도 무사한 것을 보면, 북한 사회도 좀 상식적 면이 있다고나 할까, 완전 무서운 나라는 아니네 하는 느낌이랄까, 어쩐지 좀 다행이네 라는 기분도 들어요. 탈북한 다음에 잡혀서 북송되면 처형당하거나 수용소에 갇히는 줄 알았어요. 하도 북한 사회에 대한 나쁜 편견이 머리에 자욱해서요.

조경일: 제가 생계형 탈북이었고 게다가 어린아이였으니까요. 그 시절에는 기근이 몹시 심했고 먹을거리를 찾아 탈북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거든요. 정치범이 아니거나 종교적인 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면 경범죄 정도의 처벌을 받습니다.

코디정: 어쨌든 결국 경계에 소속된 사람의 무게를 짊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때요? 고향을 떠난 사람이 짊어지게 되는 삶의 무게는?

조경일: 경계에 서 있는 사람으로서 여기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저기서도 환영받지 못한 존재이지요. 제가 선택했다고 보기 어려운 탈북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무겁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취직하고, 돈 벌고, 안전을 취하는 것도 좋거든요? 삶의 한 방편이고, 그럼 그게 저한테는 성공이지요. 하지만 저는 좀더 가고 싶어요. 저는 탈북 1세대 혹은 1.5 세대 정도됩니다. 고향을 떠나 이곳으로 이민을 온 것이지요. 어디를 가나 이민 1세대는 마찬가지로 힘든 법이잖아요?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들도 세탁소를 하거나 하면서 다들 어렵게 살았잖아요. 우리들 이민 1세대는 그런 운명 같아요. 황무지를 개척하는 개척자 역할에서 끝나는 것이지요. 그다음 세대가 잘 자랄 수 있도록요. 저도 아직은 어린 나이지만 앞으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언젠가가 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만들어 가는 심정이고, 또 그것을 제 사명감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고된 과정이고요.

코디정: 말은 쉽지만 현실의 벽은 단단했을 것 같아요.

조경일: 네. 그렇지요. 동족이라서 묘합니다. 그래서 서러울 때도 있지요. 남과 북은 같은 민족, 같은 동포잖아요? 자연스럽게 기대감이 생겨요. 하지만 지나가는 말이라도 ‘간첩 아니냐?’라는 얘기부터 ‘탈북민들이 이걸 잘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까지 많이 받습니다. 이곳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같은 운명이겠습니다만, 우리에게 인생은 투쟁입니다. 이곳에서 우리 인생의 황무지를 개척하기 위해서 신뢰투쟁, 인정투쟁을 해야 합니다. 말 하나하나가 중요하지요. 사람들이 우리를 인정할 수 있도록 실력을 키워야 하고, 인정을 받기 위해 이곳 사람보다 더 노력해야 하고요. 연대의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잘하면 다른 탈북민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이 갈 수 있거든요.

코디정: 조경일 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시죠?

조경일: 2019년부터 김영춘 국회의원실에서 비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김 의원 님이 21대 총선에서 낙선하시고 국회 사무총장을 맡게 됐을 때에는 국회사무총장 비서로 일했지요. 사무총장 님이 부산시장 보궐선거 때문에 국회를 떠나실 때 함께 부산에 내려가서 선거운동을 했어요. 선거에서 졌잖아요? 선거 끝난 다음에는 다시 서울로 올라 와 지금은 잠시 쉬고 있습니다. 가끔 현장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기도 하고요. 

코디정: 무슨 현장요?

조경일: 노가다요. 지금은 주로 지난 날들을 정리하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영춘 의원 님이 서울에 올라오시는 일이 있어서 수행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 저는 열 일 제치고 의원 님을 수행하면서 모십니다. 저의 대장이니까요. 뭔가를 준비하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이 무엇이든 계속 정치 분야에서 일을 할 생각입니다.

코디정: 오래된 생각인가요, 아니면 우연히 정치 쪽에 연이 닿았던 것인가요?

조경일: 오래된 생각이에요. 대학교도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고, 대학원에서도 정치를 전공했어요. 연구소에서도 일하고 정치컨설팅회사에서도 일했으니까요.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 2007녀부터 계속 정치와 관련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웃음)

코디정: 왜 하필 정치였어요?

조경일: 이게 이야기가 좀 깁니다. 저는 언젠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통일이든 무엇이든 기여를 해야 합니다. 그게 저한테는 정치였어요. 제가 한국에 왔을 때가 열일곱이었거든요. 중학교 3학년에 들어갈 줄 알고 집 근처 중학교 행정실에 방문했더니 초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거예요. 탈북 과정을 거치면서 북한에서 초등학교 과정도 졸업하지 못했으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초등학교를 졸업했다고 말했을걸 하는 후회도 했습니다. 

코디정: 아,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걸 좀 묻겠습니다. 홍길동이 탈북해서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면 홍길동은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조경일: 먼저 국정원 조사를 받습니다.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인 조사를 받아요. 같은 걸 계속 묻고 쓰고 또 묻고 쓰고 합니다. 살던 곳의 지도를 그려 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지도와 위성사진을 비교하기도 하고요. 이 사람이 다른 의도가 없는지 조사하는 것이지요. 어디 출신이다 그러면 국정원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그곳 출신 탈북자에게 연락합니다. 그 사람 아느냐고요. 국정원 조사를 마친 다음에는 3개월 정도 <하나원>이라는 곳에서 정착 교육을 받습니다. 자유민주주의와 한국사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는 곳이지요. 정착생활은 저마다 다르지만 기본적으로 복지제도가 잘 되어 있어요. 임대주택이 제공되고 5년간 주거 급여가 나옵니다. 그런데 임대주택에 딱 문 열고 들어가면 정말 아무것도 없어요. 텅 빈 공간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막막한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정보과 담당 형사들이 많이 도와줍니다. 이것은 여기에서 사야 하고, 저것은 저곳에서 장만해야 하는 등등. 담당 형사가 멘토 역할을 하곤 해요. 

코디정: 예를 들어 홍길동이 조경일 님 동네에서 탈북해서 한국에 왔다. 그러면 국정원이 조경일 님에게 전화를 하는 거겠네요? 홍길동 아느냐고요.

조경일: 네. 그래서 저는 국정원에서 전화가 오길 기다려요. 국정원에서 전화가 왔다는 것은 누군가 탈북했다는 것이고 그 사람이 제가 아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미거든요. 그 사람이 제 아빠일 수도 있고요. 지금까지 한 번 그런 연락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니었습니다만.

코디정: 자, 그러면 아까 그 중학교 행정실 안으로 다시 들어가지요. 중학교는커녕 초등학교에 가야 한다는 반응이었습니다.

조경일: 네. 이건 아니다 싶어서 검정고시 과정을 거치기로 했어요. 검정고시로 초중고를 졸업한 것이지요. 1년 3개월 만에 초중고 모두 졸업했어요. 만날 사람도 없으니까 또 너무 공부하고 싶었으니까요. 매일 6시에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학원가고 그런 단순한 생활이었어요. 검정고시 학원을 다닐 때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쳐 주던 분이 계셨어요. 어느 날인가 부평역 역사 안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과외 수업을 받다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거든요. 그때 남과 북이 통일이 되었으면 좋겠고 그런 일에 제가 뭔가라도 기여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말했더니, 그분이 제게 대학에 가면 정치외교학과를 나와서 외교관이 되면 좋겠다는 거예요. 아, 정외과라는 게 있구나, 했지요. 또 어느 날인가 탈북한 학생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에 가게 됐어요. 그곳에서 만난 대학생 멘토 덕분에 대학교 탐방을 하게 됐거든요. 그때 탐방한 학교가 성균관대학교였습니다. 멘토는 성균관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생이었고요. 그래서, 아, 성균관대학교 정외과로 진학해야겠다, 그게 제 목표가 됐어요. 또 목표 대로 진학했고요. 제 인생은 제 힘으로는 불가능한 여정이었잖아요. 저와 달리 같은 여정에서 실패한 무수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저는 정말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공부를 해서 실력을 키워야겠다고, 나도 남을 돕는 손길이 돼야겠다고, 정치가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겠냐고, 그런 생각을 지금껏 합니다. 은혜에 대한 부채의식 같은 것이고 또 저의 책임의식입니다.

코디정: 자, 대학에 들어가니 어땠어요?

조경일: 스무 살 07학번으로 제 나이에 입학해서 같은 나이의 ‘남한 친구들’과 처음으로 어울렸습니다. 한국생활 3년차에 본격적인 대학생의 일상에 스며든 것인데요. 동일한 수업을 듣고 성적 평가도 동일했습니다. 북에서 왔기 때문에 봐준다거나 특별한 혜택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똑같이 경쟁해서 성적을 받아야 했습니다. 매우 어려웠어요. 그러면서도 동아리 활동도 했어요. 율동패였어요. 동아리 성향은 ‘진보’였습니다. 비정규직 문제, 반값등록금 문제, 평화통일 관련 행사, 촛불집회 등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정치가 다 해결하지 못하거나 부재한 그런 공간들에서 격동하는 한국 사회의 주요 이슈를 현장에서 목격한 셈이지요. 북에서 왔는데 그런 진보적 이슈 현장에 나가는 것이 괜찮냐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내게 진보든 보수든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약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거든요. 내 자신이 아무도 내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지 않는 약자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깨달았습니다. ‘통일이라는 것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오지 않겠구나.’ ‘당장의 문제들이 우리 한국 사회에서도 이렇게나 많구나.’

코디정: 생각이 많았을 것 같아요. 군대는 안가나요?

조경일: 면제입니다. 

코디정: 그렇군요. 그럼 계속 대학을 다닌 거예요?

조경일: 아니요. 2년간 휴학했습니다.

코디정: 왜 휴학했을까요?

조경일: 마침 크리스천 프로그램을 통해 미국으로 갈 기회가 생겼 거든요. 미국이라니. 설렜습니다. 북에 있을 때 ‘철천지 원수’라고 배웠던 그 미국이었습니다. 미국 남부 텍사스로 건너갔어요. 선교 프로그램의 일환이어서 캠프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습니다. 미국 여러 주州에서 온 친구들은 물론 일본, 덴마크 등 각국에서 온 친구들도 있었고요. 그곳에서 1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생활도 되돌아 봤고요. 앞사람이 뛰니 나도 같이 뛰어야만 하는 불안감에 대해서도요. 그다음 선교활동의 일환으로 인도와 멕시코에도 갔는데 북한의 시골만큼이나 낙후되어 있고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들이 즐비한 모습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어요. 대한민국이 참 잘사는 나라구나, 자유가 있어도 북한처럼 찢어지게 가난할 수도 있구나… 어느 나라든 부유한 사람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요. 물론 똑같이 배고파도 자유로운 몸으로 배고픈 것이 덜 억울하겠지만요. 그 후 연구여행으로 중국 동북 3성에도 간 적이 있어요. 맞은편에서 두만강 건너편을 바라보는데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코디정: 그랬겠네요. 말씀하신 것처럼 배고파도 자유로운 몸으로 배고픈 게 낫지요. 그런 자유가 바로 정치의 존재 이유일 거예요. 아까 정치컨설팅 회사에서도 일했다고 하셨잖아요? 선거 캠페인 관련 일도 많이 했었을 텐데. 그러다가 또 국회에서도 일했잖아요. 어때요, 가까이에서 본 정치인들은요?

조경일: 컨설팅회사에서 선거 캠페인을 하면서 여의도 선출직 정치인이 만들어지는 과정,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싸움의 기술 같은 것을 봤어요. 직간접적으로 총선을 관전하면서 여의도 정치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이해했어요. 정치가의 민낯도 봤지요. 괜찮은 정치인이 있는 반면에 정치인이 돼서는 안될 것 같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판이 원래 그런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결국 선택 받는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니까요.

코디정: 그런데 김영춘 의원실에는 어떤 계기로 비서로 채용된 거예요?

조경일: 먼저 2017년에 인턴과정으로 김두관 의원실에 채용됐어요. 인턴은 기간이 끝나면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다음 단계로 여러 국회의원실에 이력서를 넣었습니다. 계속 1차에서 떨어졌어요. 서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던 거죠. 이력서에 줄곧 고향을 썼거든요. 서류에 탈북자임을 밝혔던 것인데, 그것 때문인가 싶어서 서류에 고향을 기재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서류심사를 통과하기 시작하더군요. 2차 면접에서는 당연히 고향을 밝혔습니다. 숨길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국회의원실에서 탈북자 출신 비서를 채용하는 걸 망설였던 것이지요. 그때 연락이 온 곳이 김영춘 의원실이었습니다.

코디정: 제가 그 사정을 좀 들었어요. 당시 채용을 담당한 신상훈 보좌관이 제게 하는 말씀이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인생 스토리였대요. 한번 믿어 보고 한번 기회를 줘봐야겠다는 심정이었대요. 당시 김영춘 의원은 해양수산부장관을 맡고 계셨는데, 조경일 비서 채용 건에 대해 보고를 하니 탈북자 출신이라는 사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네가 마음에 들었다면 나는 좋다.”였대요. 그런데 어때요? 김영춘 의원과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그분이 매우 총명하신 데다가 일을 직접 챙기시는 스타일이셔서...

조경일: (웃음) 어렵고 힘들었어요. 그렇지만 일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인턴으로 있었던 김두관 의원실과도 분위기가 아주 달랐어요. 김영춘 의원님이 일에 관해서는 매우 엄격하시지만 사람관계에서는 권위적이지 않으세요. 공평하고 소탈하십니다. 게다가 의원실 내에서도 위계를 세우기보다는 비서라면 누구든지 의원님과 직접 소통하는 문화였거든요. 제가 북에서 왔다고 해서 특별히 배려해 주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저는 고마웠지요. 배려가 오히려 불편하거든요.

코디정: 21대 총선에서는 보수정당인 야당에서는 태영호, 지성호 두 명의 탈북 정치인을 국회의원으로 당선시켰습니다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아직까지 없지요? 

조경일: 그 부분이 많이 아쉽습니다. 최초의 이주민 국회의원, 최초의 여성 대통령, 최초의 탈북민 국회의원, 최초의 30대 당대표 모두 보수당에서 먼저 했어요. 이런 진보적인 아젠다 면에서는 보수당이 더 낫다는 게 아이러니지요.

코디정: 오히려 예전에 민주당 모 정치인이 “어디 근본도 없는 탈북자 새끼들이 굴러 와서”라는 표현을 써서 크게 논란이 일어난 적이 있었어요. 

조경일: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실력을 키워야 합니다. 인정투쟁, 신뢰투쟁을 벌이면서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야 하는 게 우리들 숙명이니까요.

코디정: 화제를 바꿔 보지요. 통일이 되면 좋겠지요? 그런데 가능할까요?

조경일: 고향을 떠난 조난자로서 저는 누구보다 통일을 원하지요. 하지만 솔직히 아주 비관적이기는 해요. 사람들은 통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코디정: ‘평화통일’이라는 단어에서 평화가 더 중요할까 아니면 통일이 더 중요한 가치일까를 고민해 본 적이 있어요. 통일을 위해 평화를 포기할까 아니면 평화를 위해 통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조경일: 제 생각으로는 여행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코디정: 오,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네요. 그런데 따뜻합니다. 갑자기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네요.

조경일: 저는 통일은 과정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목적지일 뿐입니다. 목적지에 이르려면 반드시 과정을 거쳐야 하잖아요. 통일을 외칠수록 통일로 가는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게 좋겠어요. 저는, 그리고 우리는 과정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분단해소 과정이겠지요.

코디정: 분단해소도 좋은 표현이네요.

조경일: 우리는 말로는 소원이 통일이라고 외치지만 마음속으로는 통일을 원하지 않아요. 

코디정: 우리 헌법이 통일을 전제로 헌법이나까 말로라도 통일, 통일 해야 합니다. 북한헌법도 보니 마찬가지더군요. 대통령이 통일을 외치지 않으면?

조경일: 탄핵사유지요. 사람들이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통일을 원하지 않는 까닭은 마음속에 평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통일로 평화가 그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통일 이전에 평화입니다. 평화가 정착되는 것이 곧 분단해소이고요. 문재인 정부의 프로세스도 이와 같고,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공존하는 것이지요. 

코디정: 그런데 우리가 첫 번째 탈북과 세 번째 탈북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했잖아요? 나머지 한 개가 남아 있습니다만…

조경일: 네. 두 번째가 남았습니다. 2002년 4월 26일 오후 2시 쯤의 일이었어요. 중국 조선인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중에 중국 공안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북송되었지요. 그때 모든 희망이 다 사라졌어요. 2년간의 탈북생활을 경험하니까 중국은 너무 부유한 나라였어요. 그런데 북송되고 말았지요. 제가 살던 동네 아오지는 한반도 지도 제일 위쪽 외진 곳이에요. 그곳에서 공부는 더이상 의미가 없었습니다. 세상 밖의 세상을 보고 왔으니까요. 어린 나이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탈북해서 한국으로 들어온 어머니가 돈을 들여 브로커를 보냈습니다. 두만강 건너편에서 어머니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아빠와 함께 갔어요. 그때 아빠가 말씀하시길 엄마가 탈북하자고 말하더라도 따라가지 말고 아빠와 함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게 어린 제 마음에 남았지요. 엄마를 만난 다음에 아빠와 함께 다시 북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탈북입니다. 사실 탈북할 의사가 없었고 자발적으로 돌아왔으니까 흔히 아는 그런 탈북은 아니지요. 그런 다음 어머니가 다시 브로커를 보내서 중국에서 또 셋이 만났습니다. 그날 밤 아빠가 술을 많이 마시고 주무시고 계셨을 때였어요. 지금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며 세 번째 탈북을 한 것입니다. 아빠 얼굴을 보면 도저히 떠날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자고 계실 때 작별한 거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맺음말

인터뷰라기보다는 끝없이 이어지는 대하 드라마를 듣는 기분이었습니다. 인터뷰 기사로 옮길 수 없는 대화가 많았습니다. 대화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인터뷰라는 상황을 잊고 말았습니다. 이 인터뷰 기사는 우리들 대화의 극히 일부임을 덧붙입니다. 과연 이 여행의 끝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어쩌면 조경일 님의 인생 자체가 ‘기적의 트래블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열여섯에 두만강 국경에서 베트남 국경까지 이동했습니다. 중국대륙을 종단하면서 열대 정글의 웅덩이를 건너 캄보디아 감옥에 수감됐습니다. 기적처럼 바다를 건너 서울에 온 후 17년의 세월 동안, 그는 정치 하나 만을 생각하며 트래블링을 하고 있습니다. 여행 정도라도 좋겠다는 분단해소의 꿈을 이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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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까지 전하는 번역, 신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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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숨결을 보라, 김석희